
자궁경부암 백신 입찰담합 사건에서 형사재판과 행정소송의 판단이 엇갈린 녹십자가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상고기각 판결을 두고 자신들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판 결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대법원이 심리를 속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23일 서울 종로구 대심판정에서 녹십자가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상고기각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청구한 재판취소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었다. 지난 21일 재판소원 첫 공개변론이 열린데 이어 두번째로 열린 재판소원 사건이다.
녹십자는 2017년 4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질병관리청이 발주한 자궁경부암 백신 '가다실' 구매입찰에서 도매상들을 들러리로 세워 낙찰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형사사건의 1심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 법원은 입찰 행위의 경쟁제한성과 직원들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25년 12월 녹십자의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녹십자는 같은 사건으로 과징금도 받아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대법원이 심리불속행으로 확정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해당 입찰 행위가 담합에 해당한다고 보고 녹십자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납부명령을 내렸다. 녹십자가 이에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서울고법은 입찰 과정에서 업체 간 경쟁이 존재했고 들러리를 세운 행위가 경쟁을 부당하게 제한했다고 판단해 녹십자의 청구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지난 2월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했다. 심리불속행은 대법원이 상고이유가 법률에서 정한 심리속행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더 나아가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녹십자는 이날 공개변론에서 같은 입찰 행위에 대해 법원이 상반된 판단을 내렸는데도 대법원이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상고를 기각한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해관계인인 공정위는 두 재판의 결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대법원이 심리를 속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녹십자는 형사 재판의 판결과 행정 소송의 판결이 경쟁제한성이라는 핵심 쟁점에서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백신 공급 확약서를 제3의 업체가 발급받아 입찰에 참여할 수 있었는지, 들러리 입찰이 낙찰가격에 영향을 미쳤는지, 유찰 후 수의계약 과정에서 가격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었는지 등을 두고 판단이 엇갈렸다는 것이다.
녹십자는 형사 재판의 판결이 공동판매계약의 내용과 거래 관행, 관계자들의 인식 등을 종합해 제3자의 공급확약서 발급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반면 행정 소송의 판결은 계약서에 제3자에 대한 발급을 금지하는 명시적 조항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다른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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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동일한 사실관계와 쟁점에 대해 법원의 판단이 상반되면 당사자는 그 이유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면서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판결을 내릴 것이 아니라 심리를 속행하고 판단 이유를 밝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녹십자는 행정 소송의 판결이 대법원의 기존 판례와 상반되게 법률을 해석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상 심리속행 사유가 있었는데도 대법원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이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한 것은 녹십자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반면 공정위는 형사 재판과 행정 소송의 결론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행정 소송의 판결에 잘못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형사 재판과 행정 소송은 증명의 정도 등에 차이가 있고 같은 법리를 적용하더라도 구체적인 증거와 사실관계에 대한 평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심리불속행은 아무런 심사도 하지 않는 제도가 아니다"라며 "대법원이 상고이유를 검토한 뒤 심리속행 사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녹십자가 상고이유서에서 형사 재판과 행정 소송에서 결론이 달랐던 것도 충분히 주장한 만큼 의견을 진술할 기회도 보장됐으며 심리불속행 판결에서 별도의 이유 제시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재판관들은 형사 재판과 행정 소송에서 고려한 증거와 사실관계가 실제로 같았는지 등에 대해 질문했다. 또 실제로 형사 재판과 행정 소송의 판결 내용에서 법률적 판단의 모순이 발생한 것인지 아닌지 등도 쟁점으로 다뤄졌다. 심리불속행 판결의 이유를 적지 않을 수 있도록 한 법률 규정과 별개로 특별한 상황에서 대법원에게 판단 이유를 제시할 헌법상 의무가 인정될 수 있는지도 논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