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SEN=손찬익 기자] 마운드에서는 서로를 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승부가 끝난 뒤에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라이벌이자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동료였다. 한국과 대만을 대표하는 차세대 에이스 하현승(부산고·18)과 류런유(17)가 맞대결을 마친 뒤 손을 맞잡고 더 높은 무대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두 선수의 만남은 제14회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 조별리그 2차전 싱가포르전이 끝난 지난 8일 대만 타이베이에 위치한 대표팀 숙소 식당에서 이뤄졌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8개국 선수단은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있다.
190cm가 넘는 큰 키와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 무엇보다 왼손 투수라는 공통점을 가진 하현승과 류런유는 전날 B조 1차전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명품 투수전을 펼쳤다.
류런유는 5이닝 동안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6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한국 타선을 봉쇄했다. 하현승은 그보다 더 긴 5⅔이닝을 책임지며 무려 12개의 삼진을 솎아냈다. 역시 실점은 없었다.
미래의 한국과 대만 마운드를 책임질 두 좌완의 맞대결에 메이저리그도 주목했다. 현장에는 MLB 스카우트 15명이 모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경기였다. 투수들이 다 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루 전 마운드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두 선수는 숙소 식당에서 서로를 발견하자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류런유와 대만 관계자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하현승이 합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 이야기가 시작됐다.
류런유에게 하현승은 낯선 상대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번 맞대결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류런유는 “미국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으로부터 300만 달러 오퍼를 받은 선수다. 대만에는 이런 선수가 없다. 어떤 선수인지 궁금해서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직접 지켜본 하현승의 투구는 기대 이상이었다. 류런유는 “릴리스 포인트가 너무 훌륭했다. 직구와 변화구의 궤적이 같아 타자들이 상대하기 어려워했다”며 “6회까지 힘차게 공을 뿌리는 스태미나도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하현승의 이닝 소화 능력이 더욱 눈에 들어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류런유는 투구 수 제한인 90구까지 여유가 있었지만 6회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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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감독님께서 더 버틸 수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내가 내려가겠다고 했다. 이미 한계가 온 게 느껴졌다”며 “한국 타자들의 기세가 워낙 좋아 초반부터 많은 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류런유가 내려간 뒤 대만이 실점하자 그는 모자를 눌러쓴 채 아쉬움을 삼키기도 했다.
류런유는 “울컥했다. 하현승과 마운드에서 더 싸우고 싶었는데 일찍 내려갔다”며 “팀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비록 5이닝 만에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류런유의 구위는 한국 타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대표팀 선수들은 “직구가 바운드될 것처럼 보여 배트를 내지 않았는데 그대로 낮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올 정도로 구위가 압도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현승도 상대를 인정했다. 그는 “구위와 수직 무브먼트가 정말 좋았다”며 “기존 슬라이더에 속도를 더한 컷패스트볼이나 슬라이더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체인지업 계열의 변화구를 추가하면 타자들이 지금보다 공략하기 더 어려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류런유는 “스위퍼를 연습하고 있다”고 답했다. 전날 승부를 펼친 두 투수가 서로의 장단점을 이야기하며 발전 방향까지 주고받는 진풍경이었다.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미래로 향했다.
류런유는 “이제 우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며 “앞으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나 프리미어12 같은 더 높은 레벨의 대회에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하현승도 “나보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어제 경기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며 “지난해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와서 내가 뿌듯할 정도였다”고 상대를 치켜세웠다.
이어 “어제가 마지막 대결이 아니다. 아시안게임을 비롯해 세계 무대에서도 다시 만나야 한다. 서로 준비 잘해서 또 만나자”고 화답했다.
두 투수의 야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맞대결뿐만 아니라 전날 상대했던 타자들과의 승부까지 함께 복기했다.
류런유는 한국 타자 가운데 엄준상을 가장 인상적인 선수로 꼽았다. 그는 “1회 첫 타석에서 완벽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한 공이었다. 무조건 땅볼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타를 만들어 외야로 강한 타구를 보냈다. 깜짝 놀랐다”고 돌아봤다.
하현승은 자신에게 유일한 위기를 안겼던 대만 타자 창이안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1회 2사 후 창이안에게 우익수 방면 3루타를 허용했던 하현승은 경기 후 창이안이 자신의 공을 두고 “예상보다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하현승은 통역과 함께 창이안을 직접 찾아가 자신의 공이 어땠는지 물었다. 약 5분간 이야기를 나눈 그는 “직접 내 공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었다. 막상 만나서 물어보니 칭찬만 해주더라”고 웃었다.
전날에는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마운드에서 물러설 수 없는 승부를 펼쳤다. 하루가 지나자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이야기하며 미래를 약속했다. 150km 강속구를 뿌리는 한국과 대만의 두 왼손 투수는 다음 만남의 장소로 아시아청소년선수권보다 더 큰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