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부장)`행정 4류, 정치 3류` 시대 오나
지난 95년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제 구실을 못 하는 것을 꼬집으며 한 말이었다. 당시 행정부 내에서는 '그래도 3류라니, 정치권보다는 낫구나. 하지만 기업인이 감히 정부 당국을 비난해' 라는 눈흘김도 적지 않았다.
그후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지난 한주 우리는 개인신용과 인터넷이라는 현대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을 두 가지나 겪었다. 전직 은행원이 낀 카드 위조단이 개인신용을 이용해 여러 계좌의 돈을 자기 집 안방의 금고에 있는 것처럼 꺼내 썼고, 주말에는 웜 바이러스로 9시간이나 인터넷 불통 사태가 벌어졌다.
그 시간 동안 당국은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보통신부는 부산하게 관계자 대책회의를 열었고 금융감독원 담당자들도 대책마련에 분주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통부는 '국민행동요령' 이라는 '뻣뻣한' 이름의 대응책을 홈페이지에 공지했고, 금감원은 '추가 피해는 없고 비밀번호 기재란을 없앤다'는 미봉책을 내놓았다. 두 곳 모두 면피에 급급한 흔적이 역력했다.
정부는 치적을 거론하며 정보화를 빼놓지 않았다. 지난해 말 인터넷 인구 2600만명(1000만 가구) 이상이 초고속통신망에 가입했다. 인터넷뱅킹 가입자는 1770만명을 넘어섰다. 증시 사이버거래는 지난해 11월 하루 평균 10조원인 300조원에 달했다. 하지만 씨를 뿌린 건 기업들이다.
8년간 정치권도 변했고 지난 대선에서는 인터넷이 새로운 선거운동 수단과 논쟁의 장으로 올라섰다. 쌍방향 논쟁으로 정치권이 여전히 욕은 먹지만 멍석은 깔아놓은 셈이다. 하지만 행정부는 정치권에 비해 오히려 모르쇠다. 정보화의 과실을 따먹지만 밭을 갈지는 않는다. '정치 3류, 행정 4류' 라는 순위변화가 현실화될 지 모른다. 정치권이 정부와 비교되는 걸 기분나빠하는 시대가 오는 걸 정부는 두려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