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방병원·한의원에서) 교통사고 경상환자를 8주씩 진단하는 건 (한의사들의) 윤리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어떻게 멀쩡한 환자들을 8주씩이나 진단할 수 있나요?"(이재만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수백억원대 보험사기 혐의를 받는 자생한방병원에 대해 경찰이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본격적인 강제수사에 착수한 것과 관련, 의사들이 "수사기관은 이번 사건의 실체를 철저히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자동차보험 한방진료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23일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이하, 한특위)는 이날 서울 용산구 의협 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한다"면서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한약 조제 관리체계와 원외 탕전실 운영, 자동차보험 한방진료 전반에 대해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경찰은 삼성화재와 현대해상 등 4개 보험사로부터 보험사기방지특별법 위반 혐의 고소장을 접수하고 지난 4월 사건을 서울청 금융범죄수사대에 배당했다. 보험사들은 자생한방병원이 교통사고 환자들에게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진 한약을 무분별하게 처방해 보험금 수백억 원을 가로챘다는 취지로 고소장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지난 9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금융범죄수사대는 보험사기방지특별법 위반 혐의를 받는 서울 강남구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 등 총 5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경찰이 해당 사건과 관련해 압수수색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처방 기록 등을 확보하고 재단 차원의 조직적인 보험금 편취 지시가 있었는지 들여다볼 방침이다.

국토교통부 고시에 따르면 교통사고 환자에게 첩약(한약)을 처방할 경우 환자의 증상과 질병 정도에 맞춰 개별적으로 처방·조제해야 한다. 고소장에는 자생의료재단 이사장과 전국 21개 자생한방병원장, 원외 탕전실 대표 등 23명이 피고소인으로 적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특위는 "이번 사건은 특정 한방병원 하나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한약 조제 관리체계와 원외 탕전실 운영 전반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라며 "한특위는 오래전부터 원외 탕전실의 불법 사전조제와 대량생산, 무자격자 조제, 관리 부실 문제를 지속해서 지적해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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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외 탕전실은 환자별 처방에 따라 한약을 짓기 위한 시설이다. 하지만 공동이용 허용으로 일부 대형 원외 탕전실이 수백 개 이상의 한의원과 거래하며 사실상 대량 생산과 대량 공급을 담당하는 시설로 운영된다는 지적이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수년간 반복돼 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상호 의협 한특위 위원장은 "환자를 진료하기도 전에 동일한 처방을 미리 만들어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공급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환자 맞춤형 조제라는 제도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은 물론, 조제와 제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더 우려되는 건 이러한 과정에서 무자격자 조제와 안전관리 부실이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일부 대형 원외 탕전실은 수백 개 이상의 한방의료기관 처방을 담당하면서도 한약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 위원장은 "비전문 인력이 조제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며 "현행 제도에는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으며, 정부가 시행 중인 원외 탕전실 인증제 역시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에 따르면, 전국 127곳 원외 탕전실 가운데 인증받은 곳은 21곳(16.5%)에 불과했다. 한방의료기관과 원외 탕전실 소재지 불일치율은 전국 평균 38%, 서울은 60%에 달했다. 2017년 한약 소비실태조사에 따르면 무자격자의 한약 조제율이 한의원은 47.9%, 한방병원은 33.7%에 달했다. 게다가 2020년 이후 정부 실태조사에서 '한약 조제 전담 인력' 항목이 삭제돼 현황 파악조차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한 '2025년 자동차보험 진료비 통계'에 따르면, 2025년 자동차보험 총 진료비는 2조8114억원으로 전년 대비 3.07% 증가했는데, 의과 진료비는 전년과 거의 비슷하지만, 한방 진료비는 1조6972억원으로 전년 대비 5.08% 증가했다. 이는 의과 진료비보다 약 5900억원이 더 많았고, 전체 자동차보험 진료비의 약 60%를 차지했다.
환자 수도 한의원이 83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방병원이 약 82만명, 의원 71만명 순이었다. 한방 분야는 2021년 1조3066억원으로 의과 분야(1조787억원)를 앞지른 후 전체 진료비를 차지하는 비중이 매년 늘어 지난해엔 전체 자동차보험 진료비의 60%를 넘어섰다.
특히 한방 입원 진료비는 5974억원으로 한방 전체 진료비의 35.2%를 차지했지만, 실제 입원 명세서 건수는 한방 전체의 4.4%인 57만4000건에 불과했다. 소수의 입원 건에 진료비가 지나치게 집중된 양상을 보인 것이다. 또 같은 상병이라도 건당 진료비가 의과보다 한방이 2.8배까지 높아, 자동차보험 진료비 불균형이 지적된다.
한특위는 "사전조제가 실제 이뤄졌는지, 동일한 처방이 반복적으로 사용됐는지, 무자격자가 조제에 관여했는지, 자동차보험금 청구가 관련 기준에 적법했는지, 원외 탕전실이 사실상 대량 제조·유통시설로 운영된 건 아닌지, 한 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는 원외 탕전실 공동이용 제도와 사전조제, 무자격자 조제 문제, 인증제의 실효성, 한약의 품질 및 안전관리 체계, 자동차보험 한방진료의 적정성 등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며 "원외 탕전실 운영기준을 강화하고 사전조제와 대량생산을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즉시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자생한방병원은 입장문에서 "당사는 수사기관의 절차에 성실히 협조하고 있으며,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될 수 있도록 필요한 자료를 충실히 제출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보도에서 제기된 '교통사고 환자들에게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진 한약을 무분별하게 처방했다'거나 '수백억 원대 보험사기 혐의가 있다'는 취지의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