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사이트]세계의 갑부들 부자증세 솔선수범, 정치권 이슈로 부각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릴리안 베탕쿠르 로레알그룹 상속녀, 크리스토프 마르주리 토탈 최고경영자(CEO), 루카 디 몬테체몰로 페라리 회장.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내가 세금을 더 내겠다”며 돈 많은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슈퍼 리치(Super Rich)들이란 점이다.
미국과 유럽이 재정적자와 경기 부진으로 진퇴양난에 빠지자 부자 증세가 전세계에 해법으로 대두하고 있다. 부자 증세는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축소로 이어질 수 있는 재정지출 감축과 달리 복지지출을 유지하면서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부자들이 앞장서 부담을 지는 모습을 보여 사회 통합에도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부자 증세로 늘어나는 세수가 많지 않아 재정적자 감축에 실효성이 크지 않고 세금을 올리면 소비와 투자가 줄어 경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부자증세 논란=부자 증세를 가장 먼저 촉발시킨 장본인은 ‘투자의 현인’이라 불리는 버핏이다.
지난해 버핏이 납부한 세금은 총 693만8744달러(한화 약 75억원)에 달했다. 일반인이 보기엔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버핏이 스스로 이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버핏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자신에게는 종합소득세율 17.4%가 적용되지만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33~41%의 소득세율이 부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버핏은 금융소득이 많은 자신 같은 부자들보다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받는 직장인들에게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워싱턴의 세금정책센터(TPC)에 따르면 미국 내 소득상위 1%의 세금부담율은 1979년부터 2007년까지 7.5%포인트 낮아졌다. 이들보다는 소득이 낮지만 상위 20%의 고소득층도 세금부담율이 4.3%포인트 떨어졌다. 부자들이 부담하는 세금이 점차 줄고 있다는 얘기다.

버핏은 증세론이 제기될 때마다 반박 논리로 나오는 투자 감소 우려에 대해서도 60년간 투자 부문에서 일해왔지만 세금이 무서워 투자를 꺼리는 사람은 못 봤다며 세율을 인상해도 투자가 줄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버핏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세율을 올리면 세수가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근로의욕 하락과 투자 감소로 세수가 오히려 줄어든다는 ‘래퍼 곡선’의 창시자인 아서 래퍼 래퍼어소시에이츠 회장은 버핏이 위선자라고 비판했다. 그는 “버핏의 부는 대부분 현금화하지 않은 자본이득으로 세금이 부과된 적이 없으며 현금화하지 않은 주식으로 재단에 기부되면 앞으로도 세금이 부과될 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을 올리자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공정한 세금제도를 원한다면 10억달러 이상의 자산가를 대상으로 부유세를 만들어 세금을 50%씩 징수하자는 제안은 왜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래퍼는 특히 “부자들에 대한 세율을 올려도 이들은 변호사나 회계사들을 고용해 세금을 덜 내게 될 것”이라며 부자 증세를 해도 부자들은 결국 조세체제를 빠져 나간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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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전미 실물경제협회(NABE)가 경제학자 회원 2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 중 절반이 넘는 56%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해법으로 정부지출 감축에 무게를 뒀다. 또 37%는 세금 인상과 정부지출 감축이 모두 필요하다고 밝혔다. 세금 인상만을 강조한 응답은 7%에 불과했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40%가 노인층을 위한 의료보험(메디케어)과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메디케이드) 관련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25%는 세울과 세금 감면제도의 단순화 등 조세 시스템의 개혁을 꼽았다. 15%는 “정부가 재정지출 한도와 재량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래퍼 회장이 버핏의 주장을 비판하고 경제학자들도 증세를 통한 재정적자 감축에 회의적이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부자 증세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실제 선거에서 증세 주장이 어떤 반응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11월에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증세를 반대하는 보수 시민운동 세력인 티파티의 지지를 등에 업고 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티파티는 태생 자체가 조세저항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티파티의 ‘티(TEA)’에는 ‘이미 충분한 세금이 부과되고 있다(Taxed Enough Already)’는 뜻도 담겨 있다. 중간선거 패배 이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시절에 시행된 부유층에 대한 감세 조치를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7월말에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미국의 채무한도 증액 협상에서도 티파티의 입김은 막강했다. 협상 타결안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원했던 부자 증세가 결국 포함되지 못하고 추후 의제로 미뤄졌다. 티파티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공화당이 강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티파티는 세금을 더 걷으려 하기 전에 이미 걷은 세금을 좀더 책임감 있고 알뜰하게 쓰라는 입장이다. 세수보다는 세출의 엄격한 관리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세출 축소를 통한 재정적자 감축은 복지지원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복지 혜택이 주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미국 국민도 적지 않아 내년 대선을 앞두고 세출과 세입을 둘러싼 견해차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독일 부자도 나섰다=프랑스 광고회사 퍼블리시스의 모리스 레비 회장은 8월30일(현지시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문에서 “사회에서 더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 국가의 부담을 더 많이 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며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 인상을 주장했다.

앞서 로레알의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 정유업체 토탈의 크리스토프 마르주리 CEO 등 16명의 프랑스 갑부들도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특별기부 등으로 세금을 더 내겠다”며 부자 증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프랑스는 부자들의 솔선수범을 바탕으로 고소득층에 대해 세금을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연간 소득 50만유로 이상의 고소득층에 대해 세율을 3%포인트 인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르코지 정부의 감세 정책 중단은 부자들이 내년에 37억유로의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내년 대선을 앞둔 사르코지 정부가 ‘좌파의 옷’을 훔쳐 입고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며 추가 세수 확보도 중요하지만 재정적자 감축에 더욱 핵심적인 재정지출을 프랑스 정부가 제대로 억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독일에서도 버핏의 추종자들이 부자 증세를 요구했다.
지난 2009년부터 금융 부자들에 대한 세금 인상을 주장해왔던 50명의 독일 부자들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50만유로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이들에게 향후 2년간 금융자산 총액의 5%에 해당하는 부유세를 부과하자”라고 제안했다. 이들은 “긴축 프로그램은 주로 가난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며 "긴축만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갑부는 아니지만 의사와 변호사 등 상당히 많은 재산을 가진 독일 부자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 야당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은 찬성 의사를 밝혔다. 반면 집권연정의 소수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은 “(증세는) 지원자에 한해야 한다”며 부유세 논의가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탈리아, 스페인은 역주행=부자증세가 기득권층의 반발과 정치적 이유로 제동이 걸리기도 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지난 8월말 이미 의회를 통과한 재정적자 감축안에서 연소득 9만유로 이상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 인상과 지방정부 예산 감축을 제외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과 야당은 재정적자 감축안 수정이 이탈리아 국민의 퇴직 후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전문가들은 이탈리아가 부자증세를 철회함에 따라 40억유로의 예산이 부족할 것이라며 이를 어떻게 메울지 불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지아다 지아니 씨티그룹 이코노미스트는 “무엇보다 부정적인 것은 정부가 수차례 예산안을 변경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정적자 규모는 이탈리아보다 더 심각한 스페인에서도 부자증세 논의가 한창이다. 스페인 정부는 지난달 26일 지난 2008년에 폐지했던 부유세를 다시 도입, 최고 소득층에 대한 세율을 대폭 올리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보류했다. 오는 11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보수 야당과 부자증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며 여론을 살피겠다는 계산이다. 부자증세에 있어서도 정치적 계산이 제1순위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유럽의 섬나라이자 유로화 사용국가가 아닌 영국에서는 부자증세가 거의 화제가 되지 않고 있다. 이미 영국에서는 연간 소득 15만파운드(약 24만5000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에 대해 50%라는 높은 세율이 부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컨설팅업체 KPMG에 따르면 영국의 소득세율은 일본(50%)과 함께 주요 8개국(G8)에서 가장 높다.
영국 정부는 오히려 이 같은 높은 세율이 기업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아 세율 인하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 집권여당의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은 부유층을 대상으로 ‘토지세’와 200만파운드 이상 고급주택에 대한 소위 ‘맨션세’ 신설을 주장하며 부자증세를 지지하고 있다. 정부의 재정지출을 삭감할 경우 공공분야의 임금 동결, 대학 등록금 인상 등을 촉발해 제2의 폭동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니 차라리 세금을 올리자는 입장이다.
한국 정부도 고민이 깊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는데 효과가 있다며 감세 카드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상급식을 비롯해 사회 전반적인 복지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복지지출 확대와 재정건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깊이 있는 고민과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