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걸어 보니 길과 강과 삶은 하나였다"

"평생 걸어 보니 길과 강과 삶은 하나였다"

이정흔 기자
2010.04.12 10:49

[머니위크 커버]4월의 웰빙프로젝트/ 신정일의 '길 위의 삶'

다산 정약용은 걷는 즐거움을 '맑은 즐거움', ‘청복(淸福)’이라 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약보(藥補) 보다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食補) 보다는 행보(行補)가 낫다.’고 썼다. 건강을 다스리는 데는 약보다는 먹는 것이 낫고, 먹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4월, 걷기 좋은 계절이다. 따스한 햇살 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반짝임, 그리고 만개하는 꽃들의 축제. 발길 닿는 곳마다 ‘자연의 축복’이 가득하다.

걷기 좋은 계절 4월의 문턱에서 20여년 동안 산하를 두 발로 누빈 문화사학자 신정일 씨를 만났다. 그는 현재 ‘우리땅걷기 사단법인’의 이사장이자 까페지기이기도 한다. 지금껏 수많은 길들을 걸으면서 쌓은 그의 인생 철학과 4월에 걷기 좋은 트래킹 코스를 함께 물었다.

♦세상은 걸어볼 만하다

“세상에서 배워야 할 건 모두 걸으면서 배웠습니다. 길이 보여주는 매 순간의 풍경,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는 인생을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평생을 길을 걸으며 살아온 사람다운 첫마디다. 신정일 씨는 한강, 낙동강, 섬진강, 금강…, 남한땅에서 흐르는 강물은 발원지까지 뚜벅뚜벅, 모두 따라 걸었다. 도합 2000km. 대한민국에 그가 걸어보지 않은 길이 있을까. 그러나 그는 아직도 걷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고 말한다. 몇번째 걷는 길이라도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매 순간, 새로운 발견이다. 수많은 길을 걸어 온 그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강물 따라 걷기를 즐기는 이유가 슬몃 궁금해진다.

“큰 물길이 흘러갑니다. 강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을 만드는 강물은, 늘 새롭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강물이 하나하나 모이고 굽이굽이 우여곡절을 겪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우리의 인생과 참 많이 닮아있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건 길 위에 있다' 니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낡고 허름한 배낭에 달아 놓은 조그만 코팅지 하나를 보여준다. ‘세상은 걸어 볼만하다.’ 그가 몸 담고 있는 우리땅걷기 사단법인의 캐치프레이즈다.

“어떤 길을 걷고 어떤 풍경을 만나더라도 길을 걷는 다는 건 내 두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한발짝도 건너 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같이 걷는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위를 매기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걷다 보면, 듣는 것과 기다리는 것,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신씨는 “이런 것이 우리 현대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들 아니냐”고 지적한다. 진지하게 말을 잇던 그가 기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강이 흐르는 서울에서 살며, 한강 물을 먹고 살지만 한강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있으세요? 가서 바라보는 것 말고 걷는 것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하고 집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집도 결국은 우리 인생 노정의 하나잖아요. 멀리서 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강만 하더라도 어디라고 할 것 없이 흐르는 강물 따라 아름다운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바쁜 생활에 쫓겨 지내다 보면 이런 간단한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인간은 모두 각자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걷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제대로 걷기’를 하려면 단단히 각오하고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가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잘 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한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질문을 받으면 대답해 줄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아장아장 첫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바로 걷기입니다. 일상 생활 중에서도 우리는 늘 걷고 있지 않습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걸으면 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단 ‘신발’만큼은 중요하다. 워킹화, 러닝화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 발에 딱 맞고 편한 그런 신발 한켤레면 족하다.

그가 신고 있던 낡은 운동화를 들어 보여준다. 양쪽 신발의 바깥쪽이 닳아서 뭉개져 있다. 팔자로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운동화 한켤레에 모두 보여진다.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걷는 방식이 있습니다. 저는 ‘춤 추듯 걷는다’고 하더라고요. 걸을 때 속도에 괜한 승부근성을 발휘하지 말라는 말은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길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속도로 걸어가는 것이니까요.”

신씨는 ‘한번에 다 걸으려 하지 말고, 띄엄띄엄 끊어서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주말에 훌쩍 태백으로 건너가 이틀을 걷고,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다음 주말에 다시 이어서 걷고, 그 다음 주에 또 이어서 걷고. 시간이 날 때마다 띄엄띄엄, 끊어서 걸으면 됩니다. 초보자라면 하루에 15~24km정도 걸을 것을 추천합니다.”

“많이 걸으면 비아그라도 필요 없다”며 그가 강권한다. 물론 하루에 15km를 넘게 걷는 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다리는 퉁퉁 붓고 몸은 녹초가 된다. 신씨는 “딱 사흘만 버티면 그 뒤부터는 잘 걷게 된다”고 훈수한다.

“예전에 한강과 낙동강을 혼자서 걸을 때 하루에 64km씩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다리가 아파서 앉았다 일어서지조차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모퉁이 때문이었습니다. ‘저 모퉁이 돌아 또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기대감 말입니다.”

모퉁이란 결국 우리 인생의 ‘희망’이다. 절망 속에서도 언젠가 이 길도 결국은 흘러갈 것을 알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다. 그가 말한다. 그래서 걷는 것은 결국 ‘삶의 치유’나 다름없다고.

신정일이 추천하는 4월, 걷기 좋은 길

1.남해 상주해수욕장~노도=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에 위치한 상주해수욕장은 워낙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아스팔트길보다는 바닷가 바윗길을 추천한다. 처음에는 길이 없다고 가기를 꺼려하지만, 바위를 넘어 가다 보면 길과 함께 더없이 멋들어진 풍경이 펼쳐진다.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노도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도 좋다.

2.무주군 부남면 용포리=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4월 둘째주쯤(올해는 날이 추워 셋째주쯤 필 수도 있다) 이 곳을 찾으면, 4km 정도 이어진 길을 따라 온통 야생 복사꽃이 뒤덮는다. 산이고 들이고 강이고 모두 다 복사꽃으로 물든 ‘자연의 황홀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꼭 들러보자.

3.섬진강 장산리~구미리= 그는 섬진강을 ‘퍼주고 또 퍼주어도 티를 내지 않는 누이 같은 강’이라 말한다. 이 길을 따라 김용택 시인이 둥지를 틀고 <섬진강> 연작시를 탄생시킨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섬진강 530리 물길 중 가장 경관이 빼어난 ‘요강바위’도 기기묘묘하다.

4.낙동강변 석포~명호= 우리 강 중에서도 오염이 많이 돼 가장 안타까운 곳 중 하나가 낙동강이다. 그러나 상류지역엔 아직도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 적지 않다. 낙동강 상류지역,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에서 명호에 이르는 길이 대표적이다. 4월 넷째주쯤 이곳을 찾으면 수진달래(물철쭉)이 한창이다.

평생 한번 꼭 걸어야 할 길

1.십이령길=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봉화군으로 이어지는 고개. 1950년대 중반까지 울진의 흥부장과 울진장, 봉화의 내성장과 춘양장을 오가던 장사아치인 ‘바지게꾼’들이 넘나들던 곳이다. 옛길이 잘 보존돼 있는데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 대표적인 트래킹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2.변산 마실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 마실길은 산과 바다를 함께 어우르는 것이 특징이다. 해안 백사장길과 호젓한 숲길이 수시로 번갈아 나타난다. 나뭇잎 숲길은 푹신하고 모래바닥 역시 말랑말랑해 걷기에 무리가 없는 코스다.

3.관동대로길= 서울에서 대관령을 넘어가는 관동대로 길 중에서도 ‘삼척시 근덕면 용화리~원덕읍 월촌리’까지의 길은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어 있는 명코스 중 하나다. 하늘과 산과 바다가 맞닿는 한국의 ‘차마고도’같은 곳이다. 조선시대 강원도 감찰사를 지낸 황희 정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소공대비’ 등 옛 사람들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길이다.

신정일은 문화사회학자이며,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제도권 교육의 전부다. 중·고등학교는 모두 검정고시로 마쳤다. 그러나 수많은 독서량에서 나온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산천 곳곳을 두발로 누비며 <다시 쓰는 택리지/휴머니스트> 등 4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소외된 지역문화 연구와 함께 국내의 문화 유산 답사 프로그램과 숨은 옛길 복원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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