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태양광 시장이 중국발 공급과잉과 유럽의 보조금 삭감으로 연쇄 도산에 빠져들던 2012년, 맥킨지(McKinsey)는 '태양광,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밤(Solar Power: Darkest before dawn)'이라는 문학적 제목의 리포트를 내놓았다. 시장의 공포와 달리 무대 뒤에서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 중이며, 한계기업의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끝나는 2015년 무렵이면 보조금 없이 자생하는 '지속가능한 대규모 성장의 새벽'이 열린다는 예측이었다. 그리고 그 전망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보다 앞선 1995년,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중 하나로 꼽히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가 개봉했다. 이후 정확히 9년 간격으로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이 이어지며, 무려 18년에 걸쳐 '비포 3부작'이 완성됐다. 스무 살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만남과 이별, 재회와 다툼, 화해를 지나며 비로소 성숙해진다. 큰 변화는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길게 완성된다. 감독이 성숙한 결말 하나를 얻는 데 18년이 필요했던 이유다.
14년 전 맥킨지의 예언대로, 오늘 태양광은 보조금 없이도 가장 값싼 발전원으로 올라섰다. 약점인 간헐성(intermittency)과 경직성을 메워 주는 짝꿍 배터리(BESS)와 더불어, 매년 전 세계 에너지전환에 투입되는 2500조 원의 절반 이상을 함께 쓸어담는다. 여기에 'AI 광풍'이 데이터센터 수요를 밀어 올리며, 이제 부동산에 이어 전 국민이 스스로를 '전력시장 전문가'로 여기는 시대가 됐다. 에너지전환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현 정부도 연일 '블록버스터급' 메가 프로젝트를 쏟아낸다. 방향과 의지는 분명 옳다.
다만 그 실행의 속도와 방식에는 조심스러운 당부를 보태고 싶다. 첫째, '전력시장 고도화'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쫓다 보면 처음부터 걸음이 엉킬 수 있다. '지산지소'는 기술 용어라기보다 사실상 정책적 지향에 가깝다. 둘째, 대한민국이라는 '거대 전력망'은 서울보다 조금 작은 태평양의 섬 괌의 '마이크로그리드'와는 다르다. 시장 참여자가 자라도록 판을 깔아 주는 편이, 정부와 공기업이 직접 선수로 뛰는 것보다 멀리 간다. 셋째, 무엇보다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한다.
'비포 선라이즈'의 두 사람은 연락처도 나누지 않은 채 헤어져, 9년을 그리워하고도 오래 어긋난다. 왜 서로를 붙잡지 않았을까. 어쩌면 너무 크고 소중한 것일수록 서두르면 쉽게 흠집이 나기 때문일지 모른다. 에너지전환의 한복판에서 땀 흘리는 사람으로서, 정부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이 말들이 낯설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급함이 옳은 방향마저 그르치고 근거 없는 역풍을 부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에, 이 고언이 작은 '충심'으로 가닿기를 바란다.
앞선 여러 나라와 달리, 우리의 에너지전환은 아직 새벽이다. 눈부신 아침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은은한 노을과 편안한 밤을 누릴 그 먼 순간까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패기'보다는 '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