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국회에 인권위원회 설치해야"

#1971년 서울 영등포. 운행을 마친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종점에 들어섰다. 21살의 대학 학보사 여기자는 이 버스에서 내린 여차장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 버스 여차장들은 승객들로부터 일일이 요금을 받았다. 버스회사에선 '삥땅'을 막기 위해 여차장들의 몸을 맨손으로 수색했다. 명백한 인권유린. 여기자는 이들을 인터뷰해 세상에 알렸다.
여성인권 불모지던 한국의 모습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여기자는 UN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린 신혜수(64)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2001년부터 4년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으로서 세계 각국의 보고서를 심의했다. 2010년엔 UN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 위원에 선출됐다. 올해 치뤄진 선거에서 재선해 2018년까지 두번재 임기를 맡는다.
◇여성인권 불모지 한국, 아무도 몰랐다
신 교수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운동권적 마음가짐이었다"며 인권운동을 시작한 계기를 밝혔다.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신 교수는 미국 유학을 결정한다. 그는 "7년 가까이 불모지를 개척하다보니 한국의 여성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되는가를 고민하게 됐다"며 미국행의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 러트거스 대학에 다니며 신 교수는 '여성의 성적 서비스와 경제발전'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룸살롱 호스티스, 마담 등 향락업소 종사자들과 접대이용자들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이다.
논문에 따르면 1970~1980년대의 한국 제조업체들은 비즈니스를 성사시키기 위해 외국바이어들에게 술과 여자를 접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외국기업은 이런 관행을 악용, 노골적으로 접대를 요구했다. 청계천의 향락업소에서 접대를 받고난 미국 대기업 직원이 성병에 걸려 그 치료까지 해준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은 여성인권의 불모지였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 교수는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국제협력위원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은 UN을 몰랐고, UN은 '위안부'를 몰랐다
한국이 UN에 가입한 것은 1991년. 당시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생소했던 것은 물론, 민간에서도 UN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던 시절이다. 신 교수는 "몸으로 부딪치며 UN의 인권보호시스템을 익혀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제네바 주재 한국 언론사가 하나도 없던 때라 국내에 알리기도 힘들었다. 신 교수는 "UN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을 알리려면 비엔나에 있던 한 언론사 특파원에게 알리거나 제네바에 상주하는 일본언론을 상대로 브리핑해야했다"며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했다.
1992년 UN 인권소위원회에 피해생존자인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공개증언회를 연 것이 반전의 계기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생한 집단강간으로 전세계가 관심을 갖던 상황. '위안부' 문제제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신 교수는 그때 UN에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제기하고 조사를 요청했다. 성과는 괜찮았다. 1995년에는 전년 새로 신설된 유엔 인권위원회의 여성폭력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방문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인 여론화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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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9월 국제여성기구 '여성·법률·개발 인터내셔널'의 제1회 여성인권상 수상자가 됐다.
신 교수는 "우선 한국이 UN에서 권고받은 인권사안을 잘 이행하도록 국내제도를 잘 만들어야 한다"며 "UN이 만든 국제기준을 이행하는 것은 각국의 자발적 의지에 맡겨져 있는데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행정부 뿐 아니라 국회 내에도 인권위원회가 있어야 하고, 사법부에도 국제인권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재판과정과 판결에 이를 잘 반영하는 판사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신 교수는 "한국정부대표, 국회의원들, 법관들, NGO대표들이 모범사례를 발표하러 해외에 불려다니는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UN인권정책센터는 대한변호사협회와 함께 매년 12월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