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에서 거둔 농산물을 선별하고, 포장하고, 제때 출하하는 일 하나하나에는 사람의 품과 시간이 배어있다. 그 오래된 산지 유통의 길목에 이제 자동화 설비와 디지털 기술이 들어선다. 사람의 손을 덜어내고 유통의 시간을 앞당기는 변화다. 농협중앙회가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 스마트화에 속도를 내는 배경이다.
지난 26일 찾은 강원 영월군 주천면의 한 토마토 농가. 30여년간 토마토를 재배해온 허민숙(60) 씨는 과거 800평 규모의 농사를 지으며 수확부터 선별·포장까지 직접 맡았다. 이른 새벽 토마토를 딴 뒤에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손수 선별기를 돌려 크기별로 나누고 상자에 담아 오후까지 농협 판매계에 가져다줘야 했다.
선별·포장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사람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허 씨는 "혼자 감당하다 보니 시간 안에 못 끝낸 물량은 출하하지 못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 APC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선별과 포장, 출하는 농협 APC가 맡는다. 예전엔 허 씨가 4∼5시간을 들여야 했던 작업을 더 이상 농가에서 떠안을 필요가 없다. 허 씨의 경작 규모는 800평에서 1600평으로 커졌고 쉴 수 있는 시간도 늘었다.

APC는 농가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모아 선별·포장·저장한 뒤 도매시장이나 유통업체로 내보내는 산지 유통의 관문이다. 강원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한반도농협 스마트 APC는 이 과정에 자동화와 데이터를 접목했다.
같은 날 방문한 APC 입고장에 토마토를 실은 지게차가 들어서자 시스템이 먼저 움직였다. 팔레트가 지정된 위치에 놓이자 전광판에 출하 농가와 중량이 표시됐다. 팔레트에 붙은 전자태그(RFID)가 미리 등록된 농가 정보를 읽어냈다.
이날 입고된 토마토는 팔레트와 운반상자를 포함해 675㎏. 시스템은 용기 무게를 빼 실제 선별할 물량을 582㎏으로 산출했다. 농가에는 입고 내역과 예상 중량이 카카오톡으로 즉시 전달됐다.
윤경훈 한반도농협 판매팀장은 "사람의 개입 없이 0.1초 만에 입고량과 예상 선별량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토마토는 사람 손을 거의 거치지 않고 선별 공정으로 넘어갔다. 카메라는 초당 10여 차례 토마토를 촬영해 색상과 크기를 살폈고, 별도 장비는 과육의 단단함까지 측정해 규격별로 나눴다.
포장과 적재도 자동으로 이뤄졌다. 선별된 토마토는 주문처 규격에 맞춰 포장됐고 QR코드에는 생산농가와 선별 시점, 포장일자, 소비기한 등의 정보가 기록됐다. 인공지능(AI) 카메라가 상품과 출하처를 구분하면 로봇이 정해진 위치에 상자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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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 능력은 크게 높아졌다. 과거 같은 인력으로 하루 8시간 동안 약 10톤(t)을 선별했다면 현재는 40t까지 처리한다.

지난해 첫 운영을 시작한 한반도농협 APC는 생산부터 판매까지 데이터를 연결하는 최고 단계인 '5단계 스마트 APC'다. 생산·입고·선별·포장·판매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의사결정과 이력 추적에 활용한다.
이 같은 수준에 오른 APC는 전국에서도 손에 꼽힌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7월 발간한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사업 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스마트 APC는 60곳에 그쳤고, 전체 APC의 86%는 수기나 엑셀로 정보를 관리하는 초기 단계에 머물렀다.
스마트화의 효과는 일손 절감에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농협 APC에는 수㎞ 떨어진 토마토 농가의 온·습도와 토양수분, 이산화탄소(CO₂) 농도 등 생육정보가 실시간으로 모인다. 농산물이 입고되면 중량 정보가 더해지고 선별기를 통과하면 품질·규격별 데이터가 쌓인다.

생산환경과 기상, 입고량, 선별 결과, 판매가격 등을 AI로 분석하면 언제 출하량이 늘거나 줄지도 예측된다. 특정 시기에 물량이 한꺼번에 몰릴 것으로 예상될 경우 대형마트 등과 미리 협의해 물량을 분산한다. 출하량이 갑자기 늘어 가격이 떨어지는 등 농산물값이 출렁이는 데 미리 대응할 수 있는 셈이다.
농협이 스마트 APC 확산에 공을 들이는 배경이다. 농가의 일손을 덜고 유통 효율을 높여 안정적인 판매와 농가소득 증대로 이어져서다.
농협은 이 같은 산지 유통의 디지털 전환을 전국으로 넓혀나간다. 내년까지 스마트 APC를 100곳으로 늘리고 산지 유통시설의 자동화를 위한 시설·장비 지원도 확대한다.

스마트 APC가 확대되면 농가는 생산에 집중하고, 선별·포장부터 판매까지는 농협이 맡는다. 지역농협이 농산물을 공동선별해 상품으로 만들면 농협경제지주가 물량을 모아 대형마트와 온라인시장 등 판로를 연결한다.
공동출하 규모도 커지고 있다. 한반도농협 토마토공선회 참여 농가는 지난해 60곳에서 올해 66곳으로 늘었고 출하량은 1487t에서 2400t으로 61.4% 증가할 전망이다. 매출액도 48억1200만원에서 약 75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종혁 농협경제지주 강원본부 연합사업단장은 "개별 산지에 흩어진 농산물을 규모화해 대형 유통업체와 온라인 등으로 판로를 넓히면서 농가의 안정적인 판매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은 "농업인이 생산과 품질 관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산지 유통시설의 디지털 전환을 확대하고, 선별·포장부터 판매까지 농협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며 "유통 효율을 높이고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해 농업인이 체감할 수 있는 농가소득 증대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