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작품 캐릭터 속으로 사라지는 배우

배우 유연석에게는 묘한 힘이 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시청자는 어느새 그 인물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고 만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아역으로 강렬한 눈도장을 찍을 때도, '건축학개론'의 건축과 선배로 전국 남성들을 적으로 돌릴 때도, 최근 '어쩔수가없다'에서 인디언 복장을 한 치과의사로 불쑥 나타날 때도 그랬다. 그는 어떤 인물을 입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옷을 걸쳐온 사람처럼 보는 이의 감정을 슬며시, 그러나 확실하게 툭툭 건드린다.
선한 결의 역할에서는 그 설득력이 또 다른 온도로 빛난다.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부터 '낭만닥터 김사부'의 강동주,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의 안정원까지. 작품마다 인물의 색은 제각기 달랐지만, 유연석은 언제나 그 길목에서 오래 기다려온 사람처럼 따스한 설득력을 발휘해왔다. 그 결과 시청자는 매번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라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져든다. 유연석이 쌓아온 신뢰는 바로 이 착각의 총합이다.

그런 배우가 SBS 금토드라마 '신이랑 법률사무소'를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에 가깝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1인 N역에 가까운 빙의 연기를 선보인다. 우연히 영안(靈眼)이 열리고 억울한 귀신에게 몸을 내어주며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신이랑이라는 인물은, 설정만 놓고 보면 자칫 산만하게 흘러갈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 복잡다단한 구조조차 유연석의 몸을 빌리니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방영 2주 차를 지난 지금, 작품은 이미 안방극장의 몰입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
흥행 지표 역시 심상치 않다. 시청률은 10%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시청자의 관심이 향하는 방향이다. 경쟁작과의 비교보다 "오늘 신이랑에게 누가 빙의할까", "다음 에피소드는 또 어떻게 펼쳐질까"에 훨씬 더 뜨거운 호기심이 쏠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제작진이 정교하게 깔아둔 무대 위에서 유연석의 기량이 기대치를 상회하며 안정적으로 질주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초반의 기세를 단박에 낚아챈 건 유연석의 유연한 캐릭터 변주였다. 코걸이 수술 중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전직 조폭 이강풍(허성태)에 빙의해 거친 충청도 사투리를 쏟아내며 건달들을 제압하는 장면, 아이돌 지망생 수아(오예주)에 빙의해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LOVE DIVE)' 안무를 맛깔나게 소화하는 장면은 각각의 결이 전혀 달랐음에도 모두 압권이었다. 두 장면 모두 SNS에서 밈으로 소비될 만큼 대중적인 파급력을 생산하며 작품의 화제성을 이끌었다. 이는 서로 다른 인물로 전환되는 순간마다 '신이랑'이라는 중심이 흔들리지 않아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장르적으로 '신이랑 법률사무소'는 한국적 정서인 '원한과 성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리한 기획이다. 지난해 '귀궁'이나 '노무사 노무진'이 한풀이라는 K-오컬트의 외연 확장을 꾀했다면, 이 작품은 한 발 더 나아가 '법적 구속력'이라는 칼자루를 쥔다. 귀신의 한을 개인적인 위로로 달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호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활용해 가해자에게 공적인 단죄를 내림으로써 지상파 플랫폼에 최적화된 명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구조다. 판타지와 법정극이라는 두 장르의 결합이 이 작품에서 유독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은, 그 서사의 개연성을 결국 신이랑을 연기하는 유연석이 몸으로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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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검사로 떠난 아버지(최원영)와 남겨진 가족의 비극이라는 예고된 서사 역시 이미 작품 안에서 천천히 불씨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그 무게조차 유연석은 빙의라는 판타지적 설정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1인 N역이라는 설정이 자칫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그가 데뷔 이래 꾸준히 쌓아온 스펙트럼인 선과 악, 코믹과 정극, 과묵함과 유쾌함을 종횡으로 오가는 능력 덕분이다. 그 넓이가 있기에, 빙의의 순간마다 그는 인물에 완전히 귀속되면서도 결코 신이랑이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결국 '신이랑 법률사무소'의 상승곡선은 배우 유연석이 오랜 시간 증명해온 신뢰라는 자산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다. 기괴할 수 있는 빙의의 순간조차 그는 인간적인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내며, 시청자가 이 기묘한 법률사무소의 문을 주저 없이 두드리게 만든다. 작품의 화려한 변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연기는, 우리가 왜 다시금 유연석이라는 이름 석 자에 안심하고 리모컨을 고정하는지를 가장 명징하게 증명하는 중이다.
박현민(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