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중2병’이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세상에 겁나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것도 너무 많아진 어른의 나이가 되고 보니, ‘중2병’ 중증이었던 그 시절이야말로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던 인생의 마지막 해방기였음을 깨닫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라무네 몽키 1988’이 그려내는 풍경도 그 지점과 맞닿아 있다. 1988년 도쿄 외곽 단베의 좁은 골목에 숨어든 비디오 대여점 한구석. 세 명의 소년은 홍콩 영화를 탐닉하며 자신들만의 영화 제작을 꿈꾼다. 온 나라가 버블 경제의 호화로운 거품에 취해있던 시절, 모두가 ‘오타쿠’라고 무시했던 소년들만이 좁은 골방에서 ‘비주류의 꿈’을 그린다.
하지만 찬란했던 중2병의 계절은 지나고, 서로를 윤, 첸, 킨포라 부르던 소년들은 비루한 중년의 아저씨가 된다. 뇌물 수수 혐의에 휘말려 좌천된 대기업 간부(유타/윤), 흥행에 참패한 영화감독(하지메/첸), 그리고 치매를 앓는 노모를 모시는 노총각 이발사(키스케/킨포). 이들이 30여 년 만에 재회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의 중학교 시절, 영화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은사 ‘마틸다’의 실종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서다.

드라마는 형식적으로 아마추어 탐정물의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장르적인 치밀함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주인공들과 악의 세력 간의 팽팽한 두뇌 싸움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주하는 범인을 쫓아가 궁지에 몰 체력조차 이들에겐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엉성함’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다. 이들이 30년 전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은 냉철한 논리가 아니라 ‘중2병’과 ‘오타쿠’ 감성이 잔뜩 묻은 그들만의 망상이다.
과거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이들은 이웃에게 가졌던 편견,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던 부끄러운 과거의 사건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2026년의 비루한 현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뜻밖의 구원이 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88년은 일본 버블 경제의 절정이자, 동시에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거대한 침체의 조짐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던 불온한 시기였다. 하지만 단베 중학교 영화연구부 3인방에게 그런 시대적 징후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 안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숨어있다’는 굳건한 믿음 앞에서는 국가적 호황도, 다가올 불황도 그저 ‘내가 알 바 아닌’ 배경음악이었을 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들에게는 불의에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어른의 사정’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건을 쫓는다. 누가 보아도 돈 낭비이고, 넓게 보면 긁어 부스럼인 이 바보 같은 행보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긁어서 터져 나오는 부스럼 속에서라도 한때 자신을 세상의 주인공이라 믿었던 그 끝 모를 자의식을 다시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PICK!

한국에도 1988년을 상징하는 작품 ‘응답하라 1988’이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의 1988년 활용법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응답하라 1988’이 쌍문동 골목길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온기와 ‘이웃사촌’을 그리워한다면, ‘라무네 몽키 1988’은 중2병 소년들의 눈을 통해 버블 시대의 부끄러운 일면을 직시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호황에 취해 사치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던 그 시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건 모니터 밖의 우리가 다름 아닌 그 물질만능주의에 길든 어른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옛 친구들과 재회해 바보 같은 탐정 놀이에 빠져든 저들이 현실과 타협해버린 나보다 훨씬 더 순수하다는 사실에 입맛이 쓰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이르면 미치루 선생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동기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보다는 30년 전 소년들이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던 그 촌스러운 단편 영화가 훨씬 더 보고 싶어진다.
30년 만에 밝혀진 진상보다 더 뭉클한 건 3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년의 얼굴에 소년의 미소를 띠고 카메라 앞에 선 아저씨들의 모습이다. 그 장면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을 것 같다.
영림(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