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은 연기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난 '명불허전' 연기
악의 굴레에 빠진 아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청춘의 한복판에서 싱그럽게 반짝이던 시절을 지나, 무수한 계절의 파고와 번뇌를 삭여낸 배우 김현주를 마주할 때 떠오르는 것은 서정주 시인이 노래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형상이다. 설익은 열정의 잔물결이 잦아들고,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오롯이 깊고 단단한 눈빛으로 가라앉은 자리. 그곳엔 오랜 인고를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원숙의 그윽함이 묵직하게 배어 있다.
올가을, 김현주는 전혀 다른 결의 두 얼굴로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관통한다. tvN 드라마 '100일의 거짓말'에서 비극을 딛고 총을 쥔 독립군 저격수로 서늘하고 형형한 눈빛을 드리우더니, 영화 '실낙원'에서는 믿음과 의심, 사랑과 공포가 뒤엉킨 내면의 심연으로 조용히 침잠한다. 두 작품 모두 '자식을 잃은 어미'라는 상실을 품고 있으나, 그 아픔을 토해내는 방식은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 비극을 안으로 삼켜내며 인물의 균열을 묵묵히 응시하는 태도는, 온갖 풍파를 겪고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누님의 단단한 거울 앞 침묵을 닮았다.
#인간의 고립과 균열을 마주하다
영화 '실낙원'은 9년 전 실종됐던 아들이 스무 살 청년이 되어 돌아오며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아홉 살의 기억에 박제된 AI 아들과 낯설게 자라 돌아온 생환 아들 사이, 주인공 류소영은 끝없는 내면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처음 대본을 마주했을 땐 담백하고 서늘한 단편 소설 같았어요. 연상호 감독님이 가볍게 메시지로 건네셨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제가 채워 넣어야 할 감정의 여백이 아득할 정도로 깊더라고요. 단순히 잃어버린 아이를 향한 정형화된 ‘모성’을 그리기보다는, 인간이 거대한 상실을 맞닥뜨렸을 때 찾아오는 지독한 고립과 공허를 날것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소영은 과연 애초에 지킬 만한 ‘낙원’이 있긴 했던 인물일까. 이미 내면에 깊은 결핍과 상처를 품고 있던 사람이 아이마저 잃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이기적인 선택과 위태로운 균열을 설득력 있게 빚어내는 것이 제 몫의 숙제였죠.”
원작의 서사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류소영의 뼈대를 세워간 여정은 치열했다. 삼척의 거친 폐탄광과 차가운 세트를 오가며 마주했던 적막한 공기는, 인물의 황폐해진 내면을 길어 올리는 도화선이 됐다.
“탄광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현실을 부정하고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던 소영의 무거운 발걸음이 온몸으로 전해졌어요. 아들이 사라진 비극을 감당하지 못해 그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도피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특히 탄광 앞 장면은 촉박한 일정 속에서 극도의 밀도로 감정을 쏟아내야 했는데,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 스태프들의 단단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토록 시린 감정의 파편들을 온전히 건져 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네번째 호흡 맞춘 연상호, 그리고 첫만남 배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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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시리즈와 '정이', '선산'을 지나 '실낙원'에 이르기까지 연상호 감독과 네 번째 호흡을 맞춘 김현주는 오랜 동지에게 보내는 신뢰를 담담히 전했다.
“연 감독님은 엉뚱한 유쾌함 속에 날카로운 통찰을 품은 창작자예요. 쉼 없이 작업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에너지를 길어 올리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죠. 배우로서 매번 전혀 다른 결의 인물을 믿고 맡겨주시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이번에도 ‘원작의 틀에 갇히지 말고 김현주라는 배우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인물을 해석해 달라’며 온전한 믿음을 내어주셨어요.”
스무 살이 되어 낯선 얼굴로 돌아온 아들 ‘선우’ 역의 배현성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선배로서의 너른 품과 온기가 묻어났다.
“현성 씨가 워낙 조용하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 초반엔 세대 차이나 배역이 쥔 무게감 때문에 적잖이 부대끼는 게 보였어요. 워낙 짙은 어둠과 혼란을 품은 캐릭터라 고민이 깊었을 텐데도 묵묵히 버텨내며 제 몫을 해내더군요. 현장에서 살갑게 대화를 나눌 여유는 적었지만, 서로 서늘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그 호흡이 도리어 극 중 두 사람이 지닌 기묘한 공기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눈빛의 온기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 디지털의 편의 속에 매몰되어 가는 현대의 공포는 김현주 스스로에게도 묵직한 물음을 던졌다.
“저 역시 스마트폰이 없으면 내비게이션조차 켜지 못할 때가 많아 문득 서늘함을 느끼곤 해요. AI가 삶 깊숙이 들어온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스크린 너머의 기계는 결코 사람 눈빛에 담긴 깊은 온기와 떨림을 대신할 수 없잖아요. 효율과 편리 속에서 인간 본연의 ‘사색’이 지워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영화가 관객들에게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가만히 자문해보는 작은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0일의 거짓말'의 서늘한 총구부터 '실낙원'의 흔들리는 동공까지, 김현주의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짙고 무르익었다. 현장을 벗어나면 코바늘 뜨개질을 하거나 호젓한 자연 속에서 숨을 고른다는 그에게선,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뒤 찾아온 평온한 자족의 기운이 은은하게 번져 나온다.
“젊은 날엔 쏟아지는 시선과 평가에 휩쓸려 마음이 흔들리고 부대끼기도 했어요. 하지만 계절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에게 해로운 것과 좋은 것을 가려내는 선별력이 생겼죠. 이제야 비로소 진짜 내 삶과 연기를 단단하게 채워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어떤 틀이나 수식어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낯설고 새로운 인간의 얼굴을 찾아 걸어갈 생각입니다.”
찬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김현주는 비로소 자신의 계절을 맞이한 노란 국화꽃처럼 고요하고도 단단하게, 세상이라는 거울 앞에 홀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