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팍한 CIA 요원의 후회 가득한 블랙 코미디, ‘와일드 호스 나인’ [장성란의 깊이 읽기]

괴팍한 CIA 요원의 후회 가득한 블랙 코미디, ‘와일드 호스 나인’ [장성란의 깊이 읽기]

장성란(영화전문기자) ize 기자
입력 2026.11.05 07:05 드롭다운 아이콘 수정 2026.11.0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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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맥도나 감독의 '와일드 호스 나인'에 대하여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은 1973년 칠레를 배경으로 CIA 요원 크리스의 후회와 죄책감을 다룬 블랙 코미디이다. CIA의 전설적인 요원 크리스는 이스터섬에서 자신의 과거 작전들을 돌이키며 회고록을 준비하고, 후배 요원 리는 그를 감시하며 동행한다. 영화는 아옌데 정권의 붕괴와 미국의 개입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의 속죄와 부끄러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멋대로다, 재수 없다, 유별나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CIA의 고참 요원 크리스(존 말코비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밀 요원의 신분을 숨기기는커녕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당신네 민주주의를 붕괴하러 왔다"고 하거나 사람 죽인 얘기를 떠드니, 그런 평을 들어도 싸다. 크리스가 그럴 때마다, 오래도록 함께 일해 온 후배 요원 리(샘 록웰)는 수습하느라 미칠 노릇이다.

이들이 있는 곳은 1973년 칠레. 이 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가 집권하던 때다. 두 사람은 수도 산티아고에서 정치 흐름을 살피다, 본토에서 3500km 넘게 떨어진 이스터섬으로 향한다. 야생마가 푸르른 초원을 달리고, 사람 얼굴을 닮은 거대한 석상 모아이 수백 개가 곳곳에 서 있는, 남태평양의 외딴 섬. 여기 왜 온 걸까.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 궁금증에 관심 없다는 듯, 두 사람은 여느 관광객과 다를 바 없이 섬을 둘러본다. 그러는 동안에도 크리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고약한 농담을 늘어놓는다. 스파이 스릴러라고 하면 보통 첩보 작전의 긴박감을 타고 달리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다르다.

괴팍한 비밀 요원 크리스와 그 성미를 적당히 받아 주며 달래는 리의 별난 여행. 그걸 느긋이 바라보며 키득거리게 된다. 그러다 남미 작전의 책임자인 MJ(스티브 부세미)가 리에게 전화하면서 이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조금씩 드러난다. 크리스가 어떤 내용으로 회고록을 쓰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다. 여기서 영화 첫머리에 크리스가 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나이를 먹으면 의문과 후회가 생겨."

그는 'CIA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수십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했다. 리와 농담을 주고받을 때마다 그 전설의 면면이 튀어나온다. 그 가운데 뭘 돌아보고 싶은 걸까. 이제 의문이 크리스를 향한다.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며 회고록에 뭐라고 쓸지 때때로 녹음하는 그. 회고록을 공룡 얘기로 시작할까 한다는 메모를 남긴다. 그러더니 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공룡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렇다. 크리스는 세계를 누비며 정신없이 작전을 좇았던 지난날을 돌이키며 후회를 곱씹는 중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와일드 호스 나인'의 시나리오를 쓸 때 맨 앞장에 단어 두 개를 적어 뒀다. '죄책감'과 '후회'. 십여 년 전 이스터섬을 방문한 것이 이 영화의 실마리가 됐다. "세상에서 뚝 떨어져 있는 듯한" 섬의 신비로움에 매료돼, 이곳을 배경으로 두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970년대 칠레의 정치 상황에 미국 정부가 관여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이야기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가 시작됐다.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경계한 미국 정부가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는 쿠데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를 배경으로 한다. 바로 그때 크리스가 죄책감과 후회를 느끼고, CIA는 그걸 위험 요소로 여긴다.

이 대목에서 영화의 주제는 크리스 개인을 넘어, 역사와 사회의 차원으로 넓어진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는 게 20세기만의 이야기일까. "영화를 편집하는 동안 이 이야기가 현재를 비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해 온 일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맥도나 감독이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하며 한 말이다. "비극인 점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인데, 그것도 점점 더 어리석고 덜 비밀스러워지고 있다. 예전에는 끔찍한 짓을 하는 걸 비밀에 부쳤다. 이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지금이 더 어둡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이 없다."

'와일드 호스 나인'은 영국의 맥도나 감독이 연출한 다섯째 장편. 모두 원작 없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고, '쓰리 빌보드'(2017)와 '이니셰린의 밴시'(2022)로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안았다. 모순적인 인물들이 상황을 헤쳐 나가려 할수록 일이 더 꼬이는 이야기를 통렬한 블랙 코미디로 풀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크리스의 과거는 과오로 얼룩졌다. 미국 정부의 입맛에 따라 여러 나라의 정치 흐름을 흔들었다. 칠레에 온 것도 그래서다. 1970년 선거로 집권한 아옌데 대통령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 국민 사이에 찬반이 나뉜다. 반대 세력을 지원해 칠레의 정치 상황을 바꾸려는 CIA. 크리스와 리가 그 작전을 수행한다. 지금껏 숱하게 해 오던 일인데, 전에 없이 후회를 느끼는 크리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게이와 여성 등에 대해 편견 어린 말을 뱉는다. 그러다 문득 진짜 속내를 내비치는 식이다. 뼈저린 후회와 외로움에 대해, 리에게 실없는 농담 던지듯 말한다. 그게 수수께끼처럼 남는다. 그 모습이 짠하다.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사진제공=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왜 자꾸 거짓말을 하냐는 질문에 크리스는 "습관"이라고 답한다. 어쩌면 그는 괴팍하게 굴며, 숨 쉬듯 거짓말을 해 온 자기 자신을 비아냥거리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동안 숱하게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고 천국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결말에서 잘못을 깨달았지만 끝내 그 죄를 씻을 수 없는 존재의 마지막을 그린다. 최후의 순간까지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꺾일지 알 수 없다. 그에 따라 희극과 비극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엇갈린다.

그래도 크리스의 곁에는 믿을 만한 친구가 있고, 이스터 섬에서 만난 야생마 덕분에 두려움을 덜 수 있다.

맥도나 감독이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두 남자가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최소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바랄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을 알아주는 진정한 벗을 곁에 두는 일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 노래하는 것 같다.

장성란(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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