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더 성장한 리센느의 향기 '펄스' [김성대의 뮤직매터스]

한 뼘 더 성장한 리센느의 향기 '펄스' [김성대의 뮤직매터스]

김성대(대중음악평론가) ize 기자
입력 2026.11.05 13:00 드롭다운 아이콘 수정 2026.11.0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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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리센느가 네 번째 EP 'PULSE'를 통해 한층 성숙하고 차분해진 음악적 정체성을 선보였다. 이번 신작은 머스크 향을 콘셉트로 하여 포근하고 관능적인 무드를 담았으며, 타이틀 트랙 'With'를 비롯해 '백화요란', '미미', '드래곤' 등 다양한 곡이 수록되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성대는 리센느가 마케팅 이슈를 넘어 음악적 본질로 성취를 이루었으며 '중소돌의 기적'이라는 표현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편집자주]-장르, 시대 그리고 세대, 국경을 넘어 중요한 건(matters) 어디까지나 음악(music)!

그룹 리센느./사진=스타뉴스 DB
그룹 리센느./사진=스타뉴스 DB

리센느(RESCENE. 원이, 리브, 미나미, 메이, 제나)의 네 번째 EP는 아바의 '댄싱 퀸(Dancing Queen)'처럼 메인 코러스를 전면에 내세운 '파이니스트 씽(Finest Thing)'으로 문을 연다.

흐릿한 목소리에서 제나의 뚜렷한 목소리로 노래가 옷을 갈아입을 때 곡은 묵직한 알앤비 비트에 실려 첫 버스(verse)를 맞이한다. 센티한 하드 오토튠 보컬과 가라앉는 신스 패드가 일으키는 몽환적인 맛은 지난 2년간 고수해 온 이들의 예술적 정체성이요, 그것은 곧 정면을 바라보던 '글로우 업(Glow Up)'에서 측면을 내비친 '립밤(lip bomb)'을 지나 창백한 옆모습을 찍은 '펄스(PULSE)'의 재킷 사진에 어울리는 차분함이기도 하다.

그렇다. 리센느는 차분해졌다. 무릇 차분함은 성장과 궤를 이루는 법. 그들 음악은 실제 성숙해졌다. 한 방향에 대한 외면은 다른 방향으로의 몰입이라는 걸 리센느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풀어낼 참이다.

그룹 리센느./사진=뮤즈엔터테인먼트
그룹 리센느./사진=뮤즈엔터테인먼트

의도된 미드 템포의 정갈함은 한순간 반짝이거나 스쳐 지나가는 가치보다 시간이 빚어낸, 깊이 있고 오래 남는 걸 좇으리라는 '파이니스트 씽'의 주제와도 통한다. 이렇듯 특정 향기를 통해 잊고 있던 과거 기억과 감정이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심리 현상인 프루스트 효과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팀답게 "끝까지 남을 향기"를 지향하면서 시작된 'PULSE'는, 리센느의 음악이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전개되리라는 걸 암시한다. 거기엔 사브리나 카펜터의 '에스프레소(Espresso)'를 닮은 '글로우 업'의 쫀득한 그루브도, '코튼 캔디(Cotton Candy)'의 리듬 파트를 세련되게 매만져준 스웨덴 팝 밴드 더티 룹스(Dirty Loops) 같은 특별 게스트도, '하트 드롭(Heart Drop)'의 찬란한 90년대 하우스도 없다.

대체로 천천히, 그러면서 진지하게 한 트랙씩 밀고 나가는 이번 신작은 콘셉트로 잡은 머스크 향의 특징, 즉 포근하고 은은하면서도 부드럽고 관능적인 무드를 시종 머금는다. 딱 한 차례 BPM을 끌어올리는 구간이 있으니 타이틀 트랙 'With'다.

물론 곡이 발랄하다고 해서 '데자뷔(Deja Vu)'나 '러브 어택(Love Attack)', '블룸(Bloom)'과 닮은 건 아니다. 되레 빠른 비트와 살짝 대비되는 보컬 톤은 회색으로 감싸인 앨범 분위기에 응하는 모습이다. 이는 과장된 신시사이저가 이끄는 다음 곡 '백화요란 (Inside Out)'에서 더 분명해진다.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어난 모습을 가리키는 사자성어(百花??)의 뜻만큼은 활짝 열려 있지만, 음악은 그와 별개로 모종의 긴장을 품고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재(EJAE)가 참여한 이 곡은 머스크 향기의 마지막 특징이던 관능적인 무드가 가장 두드러진 곡이다. 다만 기존 곡 'Pinball'과는 다른 느낌의 관능이다.

그룹 리센느./사진=스타뉴스 DB
그룹 리센느./사진=스타뉴스 DB

케이팝 프로듀서 팀 몬스터 넘버 나인(mOnSteR nO.9)과 보라도리(Voradory)를 중심으로 짠 송캠프에서 태어난 '미미(MEME)'는 언어유희다. 겉으로 볼 땐 리센느를 유명하게 해 준 "거제 야호"의 밈을 뜻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나(Me)'를 두 번 부르는 말이다. 몬스터 넘버 나인과 보라도리는 이 곡에서 크리에이터와 편곡자로선 물론 인트로 피아노부터 신시사이저, 베이스, 드럼까지 모두 직접 연주했다. 템포는 느리지만 1분 30초대에서 짧게 폭발하는 미나미의 속사포 랩과 그보다 20여 초 뒤 빠르게 쪼개지는 비트가 다소 정겨운 곡 분위기에 날카로운 포인트를 만들어준다.

앨범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드래곤(Dragon)'은 심장 박동 혹은 맥박(PULSE)을 타이틀로 내건 작품의 미디엄 템포 성향을 그대로 잇는다. 듣는 이들은 거기에서 원이를 둘러싼 보컬 화음의 입체감을 만끽할 수 있다. 점멸하는 신스 사운드가 곡 전체에 네온처럼 드리운 이 노래는 아마도 머스크 향의 "포근하고 은은한" 부분이겠다. 화려한 훅이나 클라이맥스 없이도 청취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드래곤'은 알려준다.

사실 나는 유튜브에서 리센느의 인기와 '리센느 빵'이라는 바이럴 마케팅이 자칫 '음악이라는 본질을 가릴 수 있겠구나' 우려한 쪽이었다. 음악으로 평가되어야 할 케이팝 그룹이 다른 일들로 이슈가 되면서 정작 좋은 음악이 묻혀버리는 현상은 리센느 같은 팀에겐 멀게 볼 때 득보다는 실이 될 확률이 높다. 다행히 리센느는 이번 미니 4집으로 한때 반짝이고 사라질 걸그룹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 성취는 소속사 대표인 이주헌 스스로가 가수이자 음악 프로듀서라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가령 신보에 수록된 모든 곡의 노랫말과 보컬 디렉팅에 그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속 메시지의 일관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리센느 멤버들에겐 천군만마의 존재로 느껴질 일이다. 자신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항상 곁에서 조력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힘일 것이기에 그렇다.

그룹 리센느./사진=스타뉴스 DB
그룹 리센느./사진=스타뉴스 DB

끝으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중소돌의 기적'이라는 표현이다.

저 말은 리센느 같은 비(非) 메이저 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과 이른바 '4대' 메이저 연예기획사 소속 아이돌 그룹을 묘하게 나누는 구실을 한다. 거기에 붙은 '기적'은 마치 저들의 성공이 운에 기댄 것 같은 뉘앙스마저 준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분명한 건 리센느도 제나의 롤모델인 블랙핑크처럼 치열한 노력과 어느 정도 타고난 재능으로 대중의 품을 얻은 걸그룹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적이라는 말이 내포한 전제, 그러니까 기이함도 불가사의도 아니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속 한 구절을 빌리면 아이돌 케이팝 시장의 치열한 "존망의 길에 운세란 없는 것"이다.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리센느의 분발은 당연한 결과다. 회사를 줄 세워 대중소로 구분 지을 일이 아니다. 리센느는 지금 착실히 자신들만의 음악 향기를 가꾸어 가고 있다. 'PULSE'는 훗날 그 이음목으로 남으리라 본다.

김성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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