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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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반도 침탈 계획은 주도면밀했다. 일본은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한반도 점령의 청사진을 그렸다. 같은 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침탈에 러시아의 양해까지 얻어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을 경우 나라를 완전히 빼앗는 게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111년 전 오늘(1905년 11월 17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와 8명의 대신들이 참석한 경운궁 어전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고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다가 자리를 떴다. 이토는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자 대신들을 협박하며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여덟 명의 대신 중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은 반대했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 소위 '을사오적'은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이토는 각료
3년 전 오늘(2013년 11월16일) 김포공항에서 한강 상공을 거쳐 잠실 헬기장으로 날고 있던 LG전자 소속 헬기가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쪽으로 경로를 이탈했다. 당시 아이파크 아파트는 절반 이상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헬기 조종사는 시야에 아파트 건물이 나타나자 급박하게 수직 상승을 시도했지만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헬기 프로펠러는 아파트 외벽에 굉음을 내며 부딪쳤고 헬기 몸체가 아파트 23층과 24층 사이 네다섯 가구를 덮쳤다. 헬기는 아파트 외벽을 상당 부분 파손하고 오전 8시54분쯤 아파트 화단에 추락했다. LG전자 소속 기장 박인규씨(57)와 부기장 고종진씨(37)는 사고 직후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망했다. 주민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짙은 안개 때문에 (조종사가) 시야를 잃어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그러나 헬기가 경로를 이탈한 이유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여론은 경로 이탈 이유에 몇 가지 의혹을 제기했지만 이내 반
1976년 충북 음성 작은 시골마을. 32살의 젊은 신부는 음성 금왕읍 무극 천주교회의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온갖 어려운 이웃들을 목격한 그는 이곳에서 가난하고 힘든 자들 위해 봉사하겠노라 마음을 굳혔다. 그러던 중 그는 무극천 다리 밑에서 그의 운명을 바꿀 사람을 만난다. 그는 최귀동 할아버지였다. 어릴적 부유하게 자란 최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족은 물론 모든 재산을 잃었다. 자신조차 끼니를 제대로 때울 수 없는 처지었지만 그는 다른 굶주린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냥한 먹을거리를 나눠주며 함께 생활했다. 이 모습을 본 젊은 신부는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을 만들기로 한다. 40년 전 오늘(1976년 11월15일)은 오웅진 신부가 장애인, 노숙인 등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를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한 날이다. 오웅진 신부는 최 할아버지가 자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흑백영화를 본 조선인들은 크게 놀랐다. 음성도 들리지 않았고 화면도 희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여느때 보다 몰입했다. '스토리'가 있는 한국 영화를 처음 본 것. 또 다른 충격은 화면에 등장한 '진짜' 여배우였다. 그의 이름은 이월화. 여자역도 남자가 분장하고 출연했던 것이 당시 업계의 불문율. 일제 치하 시절, 전국으로 배포된 이 영화는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95년 전 오늘 (1921년 11월14일)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 '월화의 맹서'가 탄생했다. 당시 작가이자 민중극단을 이끌던 윤백남 선생이 감독을 맡았다. 이는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도 모두 조선인이었던 최초의 영화다. 특히 눈에 띈 건 여주인공. 조선 연극배우로 활약했던 이월화가 주인공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는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다. 여성 역할을 맡는 남성이 있을 뿐이었다. 여배우라는 단어가 이월화를 계기로 처음 등장하게 됐다. 두번째 주목 받았던 것은 영화에 내용이 들어갔다는 것
46년 전 오늘(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스물 두 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며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시위는 무위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그 순간 전태일은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불타는 몸으로 사람들이 서성이는 거리로 뛰쳐나와 마지막까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다가 쓰러졌다. 전태일의 몸을 삼킨 불길은 3분가량 타다가 꺼졌다. 당시 그 자리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법전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어 전태일의 한 친구가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전태일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10시 사망했다. 당시 노동현실은 '분신 투쟁'으로 호소해야 할
중국 혁명의 선도자, 정치가, 공화제의 창시자, 그리고 국부(國父). 1866년 11월12일, 광둥성 췌이헝 마을에서 빈농의 아들 쑨원이 태어났다. 고향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던 쑨원은 14세 때 형 쑨메이가 일하고 있는 하와이로 찾아가 호놀룰루에 위치한 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의 교리와 서구 학문을 배웠다. 1882년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우상 숭배를 타파한다며 마을의 수호신 인 목상(木像)을 절단해 마을에서 쫓겨났다. 홍콩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낸 쑨원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하와이로 가서 흥중회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었다. 화교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려했지만 봉기 계획이 발각돼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6년 영국 런던으로 갔고 이곳에 머무르면서 이른바 '삼민주의(三民主義)'의 토대를 구상했다. 이후 쑨원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런던을 거쳐 1897년 일본에서 다시 세력을 결집했고 1905년 8월 혁명에
56년 전 오늘(1960년 11월11일) 제2공화국 장면 총리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기능을 담당하는 정보부서로 ‘중앙정보연구위원회’(중앙정보위)를 창설한다. 군과 경찰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중앙정보위는 국가기밀 보안 업무, 내란죄 및 반란죄 수사 등을 맡았다. 이듬해 3월 장면 총리는 또 다른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을 설치했다. 장면 총리는 이들 정보기관 첩보로 1961년 봄부터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쿠데타를 끝내 막지 못했다. 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면서 제2공화국은 붕괴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월20일 중앙정보위와 시국정화단을 통·폐합하고 ‘중앙정보부’를 설치했다. 초대 부장은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가 맡았다. 중앙정보부 역시 미국 CIA의 대응기관으로 출발했지만 점차 지위가 격상됐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고 주변 공산국가를 상대하기 위해 헌법 이상의
77년 전 오늘(1939년 11월10일)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 개정됐다. 조선총독부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추진한 황민화 정책으로 개정된 법규의 주요 내용은 창씨개명과 서양자제도의 신설이었다. 창씨개명은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강제로 한국인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고 서양자제도는 사위를 삼을 목적으로 양자를 입양하되 양자는 양가의 씨를 따르는 제도다. 개정 법규가 시행된 1940년 2월11일부터 접수를 시작한 창씨개명 신청은 이틀 만에 87건이 제출됐다. 그중에는 소설가 이광수, 변호사 이승우, 종로경방단장 조병상, 공주 갑부 김갑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앞서 이광수는 창씨개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도 전부터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을 적극 권고하는 칼럼을 기고하고 '매일신보'에도 '선씨고심담', '창씨와 나' 등 창씨개명을 홍보하는 글을 기고했다. 조선총독부는 그해 8월10일까지 창씨를 완료하도록 하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27년 전 오늘(1989년 11월9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귄터 샤보브스키가 '여행 자유화 정책'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에 섰다. 그는 일정 요건을 갖추면 동·서독 국경 출입을 허용하고 주변국 여행 허가 절차도 간소화한다는 발표문을 읽어 나갔다. 이때 한 기자가 "새 규칙이 언제부터 효력을 발휘하느냐"라고 묻자 샤보브스키는 별 생각 없이 "지금 당장"(immediately, without delay)이라고 답했다. 언론은 샤보브스키의 발언을 동·서독 간의 여행이 전면 허용됐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외신 기자들은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는 소식을 일제히 전했다. 서독 TV 방송도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알렸다. 방송을 들은 동·서독 주민들은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평소라면 즉각 발포했을 국경수비대는 쇄도하는 인파에 당황해 국경을 열고 말았다. 장벽에는 통로가 뚫렸고 서독인은 동쪽으로, 동독인은 서쪽으로 건너갔다. 1961년 세워져 ‘분단 독일’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 이를 은폐하고, 진상규명을 저지하려는 세력들이 공공연하게 탄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어도, 덮어서도 잊어서도 안되는 것이 역사라는 사실. 이것이 인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2009년 11월8일 김병상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기념사 중) 2009년 11월8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선생 묘소 앞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가 열렸다. 보고대회는 당초 인근의 숙명아트센터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보수단체와의 충돌을 이유로 대관 계약이 갑자기 취소되면서 불가피하게 김구 선생 묘소 앞에서 열리게 됐다. 이날 갑작스런 장소 변경은 어쩌면 예견된 시련이었다.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한 인물들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은 발간 전 작업 준비단계부터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외환위기 여파(1997년)로 민족문화연구소 후원 회원이 줄어 재정상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2003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핑퐁 외교·베트남 종전'과 '워터게이트' 미국 37번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44년 전 오늘(1972년 11월 7일) 재임에 성공했지만 워터게이트(Watergate scandal) 사건으로 2년 뒤(1974년 8월 9일)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는 임기를 마치지 못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변호사 출신 해군 소령으로 종전 후 정계에 입문한 닉슨은 상·하원에서 반공주의자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39살의 나이로 부통령까지 올랐다. 미국 34번째 대통령인 아이젠하워(42·43대)와 부통령을 연임했다.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춘 닉슨은 1960년 존F.케네디에 패배했지만 8년 뒤 재기에 성공해 46대 대통령에 올라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그는 특히 냉전시대 '대화의 아이콘(상징)'으로 부상하며 미국을 넘어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69년 베트남전 철수를 골자로 한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방위도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는 정책으로 경제적 어려움
1995년 11월6일 아침, 경주 정씨 제안공파 종친회는 457년 전 죽은 조상의 생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에 있는 선산에서 이장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조선 중종 때 통례원 정5품 찬의를 지냈던 정온(1481~1538)은 그렇게 후손들을 만났다. 그는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제안공 정효상(1432~1481)의 2대손이었다. 정온의 시신은 부패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중목관 안에 있었다. 바깥쪽 관은 가로 90㎝, 세로 240㎝, 두께 12㎝, 안쪽 관은 가로 60㎝, 세로 210㎝, 두께 10㎝ 크기로 연결 부분마다 송진으로 빈틈없이 칠해져 있었다. 관의 바깥 부분은 석회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습기를 완전히 차단했다. 정온의 시신은 국내에서 발견된 미라 중 가장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문가들은 그의 시신이 밀폐된 관 안에서 오랫동안 진공 상태로 보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키 170㎝의 시신은 상체와 하체 모두 뼈와 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