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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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제정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섬유공장. 영하 20도에 달하는 혹한 속에서 몇 시간째 식량 배급을 기다리던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공장노동자들은 '빵을 달라'며 분노를 터트렸다. 99년 전 오늘(3월8일) 러시아 '2월 혁명'의 봉화가 오르는 순간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현재 통용되는 그레고리력과는 달리 정교회에서 인정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두 달력간 13일의 차이로 인해 혁명은 그레고리력 기준으로 3월에 일어났지만 율리우스력으론 2월이어서 2월 혁명으로 불린다.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하고 물가는 마구 치솟던 상황이었다. 빵값은 물론 난방에 쓸 재료마저 살 수 없었다. 당장 굶어죽을 위기에 놓인 러시아인들은 도시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당시 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여성과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 폭동은 순식간에 도시 전역으로 확산됐다. '빵을 달라'던 구호는 '차르 타도
초·중·고교는 각각 몇 년씩 다니는 게 적정할까. 학교를 다니는 적정 나이는 몇 살일까. 국내 학제가 '6·3·3·4학제'로 개편된 지 반백년이 넘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학기 시작 시점, 학제 개편 논의는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 학제는 65년 전인 1951년 3월7일 국회에서 채택됐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의 학제는 이때부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학제가 채택되기 전에는 초등학교 6년, 중·고등과정 5년, 대학과정 4년인 6·5·4학제가 운영됐었다. 당시 국회의 6·3·3·4학제 채택에는 미국의 영향이 컸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미군정 당시 9개 분과 중 하나였던 제2분과 소속 조선교육심의회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조선교육심의회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는 학교제도가 필요하다며 미국 학제를 본 뜬 6·6·4의 단선형을 제시했다. 1949년 12월31일 이 틀을 기본으로 한 학제가 법으로 제정됐다. 하지만 특수학교, 기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기회로 잡아 조선의 항구를 개방하도록 하는 강화조약을 맺자고 했다. 일본은 '일본 국기가 게양된 운요호에 조선 수군이 왜 포격했느냐'고 조약을 이유를 내세웠다. 당시 조선 임금과 조정에선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만 있었을 뿐 국기에 대해선 개념조차 없었다. 뒤늦게 국기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게된 고종은 1882년 김홍집과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해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했다. 하지만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김홍집은 "반홍반청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어기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해 제작된 최초 태극기는 1882년 5월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
1987년 오늘(3월 5일) 한국 기아자동차(당시 기아산업)는 일본 마쓰다, 미국 포드사와 합작으로 '기아 프라이드'(해외명 '포드 페스티바')를 출시했다. 기아는 생산을 맡고 마쓰다는 설계를, 포드는 판매를 맡았다. 1970년대 후반까지 기아는 마쓰다의 소형차종인 '브리사'를 라이선스 생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어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새로운 차종을 생산하지 못했다. 프라이드는 규제 정책 해제 후 기아에서 처음으로 생산한 모델이었다. 기아에서 당시 '400만원 미만인 차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프라이드의 출시가격은 329만5000원이었다. 기아에 있어 프라이드는 성공의 견인차였다. 프라이드는 가성비 높은 차로 입소문을 타며 출시 당시 국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시 1년6개월 만에 10만대를 수출했고 2000년 단종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약 70만2450대, 국외에서 80만5725대 등 총 150만대 가량을 팔
2001년 3월4일 오전 3시48분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2층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큰길에서 화재현장에 이르는 약 200m의 이면도로 양쪽에는 승용차들이 빽빽이 주차돼 있었다. 이날 화재현장엔 소방차 20여대와 소방관 46명이 출동했으나 골목에 주차된 차량들로 인해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현장으로부터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내린 소방관들은 소방호스를 끌고 뛰었다. 다행히 진화작업 시작 5분여만에 불길을 잡고 집주인과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하지만 '내 아들이 안에 있다'는 집주인의 말 한마디에 소방관 9명이 주택 안으로 들어간 직후 사제벽돌로 지어진 주택건물에서 '꽝'하는 소리와 함께 2층 주택 전체가 내려앉았다. 국내 소방 역사상 가장 많은 소방관이 희생당한 '홍제동 주택 화재 사고 참사'의 시작이었다. 매몰된 소방관들을 구하기 위해 시내 11개 소방서 구조대 200여명과 경찰 10여명 등 210여명과 포크레인 등 장비가 현장에
1991년 3월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인근 레익뷰 테라스에서 포니 엑셀을 타고 과속으로 달리던 한 흑인청년이 경찰에게 붙잡혔다. 6명의 백인 경찰들이 그를 둘러쌌고 이 가운데 3명이 청년을 도로바닥에 눕히고 경찰봉으로 머리와 가슴 등을 50여차례나 구타했다. 여러명의 경찰들이 과속운전을 한 흑인 한 명을 붙잡아 몰매를 가한 이 모습이 마침 새로 산 비디오카메라의 성능을 시험하던 한 시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25년 전 오늘(3월3일) 찍힌 1분10초 남짓한 이 장면은 다음날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미 전역이 들끓게 된다. 폭행당한 흑인 청년의 이름을 딴 이 일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으로 명명되면서 미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경찰의 가혹행위를 대표하는 사례가 된다. 사건 발생 3일 후 검찰이 소를 취하하면서 킹은 석방되지만 미 전역 소수계 민권운동가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경찰의 직권남용을 비난하고 나서자 대배심원이 킹의 구타에 관련된 경관 6명을 기소한다. 사건
"만세! 만세!" 11년 전 오늘(3월2일) 오후 5시. 국회 본회의장 복도 휴게실에선 여성계 인사 100명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호주제’(戶主制)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찬성 161표, 반대 58표, 기권 16표로 통과된 것. 여성계 50년 숙원이 이뤄진 순간이다. 호주제는 가족 관계를 호주(戶主)와 그의 가족으로 구성된 가(家)를 기준으로 정리하는 방식으로,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에 가족집단을 구성하고 이를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게 하는 남계혈통을 통해 대대로 잇게 하는 제도다. 호주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일본 호주제가 유입돼 제도화됐다는 게 지배적인 설이다. 다만 일각에선 그 연원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일제 조선민사령에 근거해 시행되던 호주제는 1960년 제정된 민법에서 체계를 갖추게 됐다.정작 일본에선 1948년 호주제가 폐지됐다. 1960년부터 호주상속인에겐 재산상속상
서울 종로 탑골공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젊은 학생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해 보이는데 그 사람은 도무지 나타나질 않는다. 그 때 학생들 중 한 명이 연단 위로 올라간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 하노라." 연단 위 학생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나머지 학생들이 태극기와 함께 준비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이를 받아든 누군가 "대한 독립 만세"라는 말을 나지막이 입밖으로 꺼냈고,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1919년 3월1일. 일제 강점기 35년간 벌어진 민족 독립 운동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3·1운동은 사실 그 해 2월 8일 동경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본 유학생인 이광수,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은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년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2월의 희귀성에 착안해 제정된 날이 있다. 바로 매해 2월의 마지막 날에 기념하는 '세계 희귀 질환의 날'이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했다. 세계 희귀 질환의 날은 2008년 유럽희귀질환기구(EURODIS)가 희귀 질환과 희귀병 환자들의 삶을 대중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알리려는 목적 하에 시작한 행사다. 처음에는 유럽 지역에서만 이날을 기념했지만 이제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80여개국이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 세계 희귀 질환의 날 슬로건은 '희귀질환자들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자'다. 희귀병에 대한 정의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미국에선 특정 질환이 20만명 중 1명 꼴로 발생할 때, 유럽에서는 2000명 중 1명 꼴로 발생할 때 이를 '희귀 질환'이라고 규정한다. 희귀병 중 약 80%가 유전적 요인에 기인하며 이외에도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 감염, 알레르기 등 환경적인 요인 등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희귀 질환 종류는 6000여개가
1902년, 한 러시아 과학자가 타액이 입 밖으로 나오도록 수술한 개로 침샘을 연구하던 중 사육사의 발소리로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와 관련된 실험을 시작했고, 먹이를 줄 때 종을 치다가 먹이 없이 종소리만 울려도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고전적 조건화 실험'을 불리는 이 실험은 '조건 반사'라는 개념을 정립시키며 대뇌 생리학의 길을 연 계기가 됐다. 2년 뒤 소화액 분비의 신경지배를 해명한 업적을 인정받아 러시아인 최초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이 과학자는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다. '파블로프의 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는 80년 전 오늘(2월 27일)생을 마감했다. 러시아 라쟌에서 태어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의학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학교 내과연구실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했다. 1890년부터 1924년까지 임피리얼 의학아카데미 생리학 교수로 일한다. 파블로프는 고전적 조건화 실험 외에도 생리학
우리나라 최초의 법인 고조선 '8조법금(法禁)'을 거쳐 대한제국 근대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와 궤를 같이 한 하나의 법률이 1년 전인 2015년 2월26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53년 대한민국 형법 제정 후 62년간 존속됐던 '간통법'이 폐지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간통을 저지른 당사자들에게 2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하는 형법 241조 간통죄 처벌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간통죄 위헌판결을 내렸다. 이날 헌재의 결정으로 인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청구인(피고인)들을 비롯해 재판을 기다리던 3000여명이 자유의 몸이 됐다. 2008년 11월 이후에 간통죄로 기소된 사람들이었다. 판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간통죄 폐지를 '선진 법문화'로 환영하는 사람들과 '불륜 면죄부'가 될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갑론을박이 오갔다. 판결 이후 콘돔 및 피임약 제조업체와 등산용품 업체 등 소위 '불륜 테
2014년 당시 61세였던 박 모씨(여)는 2006년부터 두 딸과 함께 서울 송파구 석촌동 반지하 주택에서 살았다. 그들은 작은 방 2개, 화장실과 부엌으로 이뤄진 33㎡ 남짓한 공간에서 구형 폴더 휴대전화 1대를 함께 쓸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박씨는 2002년 남편이 방광암으로 사망한 뒤 식당 일을 하며 홀로 생계를 꾸려왔다. 큰 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심하게 앓아 전혀 일을 할 수 없었고 작은 딸은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해왔을 뿐 일정한 직장이 없었다. 두 딸 모두 신용불량자였다. 이 세 모녀는 2년 전 오늘(2월26일) 오전 8시30분쯤 자택 침실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방 안엔 타다 남은 번개탄 1개가 은색 냄비 안에 담겨 있었다. 창문과 문 틈새는 연기가 나가지 않게 청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정말 죄송하다"며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 70만원이 든 봉투를 남겼다. 가슴을 먹먹하게 한 가난한 가족의 슬픈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