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로드니 킹 구타 사건


1991년 3월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인근 레익뷰 테라스에서 포니 엑셀을 타고 과속으로 달리던 한 흑인청년이 경찰에게 붙잡혔다. 6명의 백인 경찰들이 그를 둘러쌌고 이 가운데 3명이 청년을 도로바닥에 눕히고 경찰봉으로 머리와 가슴 등을 50여차례나 구타했다.
여러명의 경찰들이 과속운전을 한 흑인 한 명을 붙잡아 몰매를 가한 이 모습이 마침 새로 산 비디오카메라의 성능을 시험하던 한 시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25년 전 오늘(3월3일) 찍힌 1분10초 남짓한 이 장면은 다음날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미 전역이 들끓게 된다.
폭행당한 흑인 청년의 이름을 딴 이 일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으로 명명되면서 미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경찰의 가혹행위를 대표하는 사례가 된다.
사건 발생 3일 후 검찰이 소를 취하하면서 킹은 석방되지만 미 전역 소수계 민권운동가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경찰의 직권남용을 비난하고 나서자 대배심원이 킹의 구타에 관련된 경관 6명을 기소한다.
사건 발생 6일 후 LA 웨스트우드에선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블랙 파워'를 외치면서 거리의 자동차를 부수고 가게의 유리창을 박살낸뒤 약탈까지 자행하는 난동이 발생했다.
상황이 확대되자 탐 브래들리 당시 LA 시장은 데릴 게이츠 당시 LA 경찰국장의 사임을 촉구한다. 경찰은 이에 맞서 킹이 음주운전을 했고 마리화나를 소지했었다고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한다.
기소된 6명의 경찰들도 경찰조사가 발표된 뒤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다. 하지만 LA경찰의 비위를 조사하기 시작한 크리스토퍼위원회에서 그해 7월 LA경찰의 인종차별 사례가 연이어 공개되자 비난의 수위가 더욱 거세졌다.
이듬해 2월 배심원이 선정되고 3월부터 재판이 시작됐다. 하지만 4월 폭행을 주도한 1명의 경관을 제외한 나머지 경관들에게 무죄 판결이 받으면서 흑인들은 거리로 나왔다.
'4·29 LA 흑인 폭동'이 시작된 것. 분노한 흑인들은 LA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을 벌이게 되고 LA시장이 비상사태를 선포해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사흘 뒤엔 주방위군도 출동했다.
다음달 4일까지 이어진 LA 폭동으로 재산피해액이 약 10억달러에 달했고 53명이 사망했다. 2000명 이상이 다쳤고 이로 인해 약 1만 1000명이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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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교포들의 피해도 막대했다. 코리아타운은 분노한 흑인들의 방화로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면서 90%가 파괴됐다. 약 600개의 업소가 화재와 약탈 피해를 당한 것으로 집계됐었다.
한인 피해가 유독 큰 이유는 흑인과 한인 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사건 당시 미국 경찰이 비버리 힐즈와 할리우드 등 LA 내 부촌을 위주로 방어한 점도 지적됐다. 폭동으로 인해 막대한 충격을 받은 교포들은 수년간 피해를 재건하는데 애를 썼다. 하지만 많은 교포들은 LA를 피해 다른 도시로 이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