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서 그래요."
골프를 칠 줄 모른다고 했더니 돌아온 지인의 핀잔이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게 게으르단 타박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내밖에 없다. 맞벌이인데도 아내는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기자 남편'을 둔 죄로 가사와 육아를 거의 도맡고 있다. 그 어떤 구박을 해댄다 해도 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던 필자가 "못 친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베짱이'로 취급당할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특히 중년 남성들에게 골프가 인기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처럼 골프에 열광적인 이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물론 여기엔 여러 가지 설득력 있는 분석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 골프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혹은 성공에 근접한 이들이 즐기는 공놀이로 자리매김했다. 이미 학연 지연 등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골프를 통해 그들의 네트워크를 더욱 공고하게 다지려고 노력한다.
더구나 골프장은 도시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하다시피한 장소다. 한가하게 며칠씩 자연을 즐기다간 자리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골프는 하루만에, 아니 꼭두새벽부터 시작하면 그날 오후엔 바로 도시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훌륭한 놀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보다는 심리학자인 김정운 명지대 교수의 분석에 좀 더 공감이 간다. 그는 저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한국 남성들이 골프에 푹 빠지는 건 골프가 '운동'이 아니라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작 자신의 삶을 상실한 중년남성들에게 골프는 비거리 이야기, 홀인원 이야기, 한방에 싹쓸이한 돈내기 이야기 등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스토리를 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골프만이 유일한 자신의 이야기꺼리인 중년 남성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내 가족,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자잘한 즐거움과 설렘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한 삶인데, 기껏해야 골프 외에 나눌 이야기가 없는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의 삶이 슬프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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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년 남성들이 주중에 일만 하고 주말마저 골프에 바치는 건 외로운 노후를 예약하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장인 중년 남성들이 밖으로만 돌 동안, 가족들은 가장이 없는 생활에 점점 익숙해진다. 엄마가 자식들과 일상에서 그들만의 소소한 추억을 쌓아가는 동안, 가장은 점차 가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물과 기름처럼 가정에서 겉돌게 된다.
지인의 부인들에게 실제로 "남편이 출장으로 며칠씩 집을 비울 때 그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을 종종 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아내도 저러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정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돼라." 경영컨설턴트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한근태 교수의 처절한(?) 조언이다. 돈 벌어오는 가장이라는 형식적인 지위가 아니라, 가정 속에서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라는 뜻이다. 요리를 하든, 심부름을 하든, 농담을 잘 하든 가족들이 가장이 없는 상황을 아쉬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돼야 쓸쓸한 노후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다. 보험을 들고 투자와 저축을 하는 것만이 노후대비가 아니다. 추억을 쌓아가며 가족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해가는 게 더 중요하다. 난 그래서 일주일에 단 하루 휴일을 골프에 빼앗기지 않고 아내와 늦둥이 아들과 함께 집 근처 탄천 변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게 더 좋다.
"왕이든 농부든 자신의 가정에서 평화를 찾아낼 수 있는 자가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괴테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