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기업, 희망의 해]현대상선 부산신항만의 하루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면 머리가 아파요. 처음엔 동료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여 웅성거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 할 일을 열심히 해야죠."
부산 강서구 현대부산신항만에서 근무하는 고상준 현대상선 화물감독은 "회사가 어수선해 일손이 잡히지 않을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이같이 대답했다. IMF 금융위기 직전인 1997년에 입사했다는 그는 "현대그룹이 500원짜리 지폐 그림 하나로 조선소를 지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만든 회사 아니냐"며 "'이봐 해봤어'라는 말을 되새기며 모두 힘을 합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 낼 거라 본다"고 말했다.
◇불 켜진 부산신항만, 해운업 유동성 위기를 잊다
유동성 위기로 2015년을 힘들게 보낸 현대상선이 운영하는 현대부산신항만을 지난달 21일 찾았다. 시각은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운 저녁 6시였지만, 야드 곳곳에 환한 불이 켜진 가운데 배에서 컨테이너선을 싣고 내리기 위해 크레인과 트럭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날 오전 7시 입항한 8600TEU급 컨테이너선 현대머큐리호를 계획대로 이날 자정에 떠나보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배가 하나 들어오면 짐을 싣고 떠날 때까지 모든 것을 관리·감독하는 게 업무인 고 감독으로서는 회사의 유동성 위기는 딴 세상 얘기로 생각될 법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격언이 떠올랐다.

혹시 밀수나 밀항 소지가 없는지, 삼엄한 검색을 거쳐 기자도 머큐리호에 승선했다. 배는 거대했다. 길이는 339.6m로 63빌딩(250m)을 눕혀놨을 때보다 더 길고, 배의 폭은 45.6m에 달한다. 가파른 임시 계단을 올라 배에 오르자 2009년 현대중공업이 울산에서 건조했다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배의 사무실에 들어가니 해양수산부 직원들이 나와 선박 설계도면을 보고 안전검사를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높이 50m는 됨직한 대형 크레인 3대가 굉음을 내며 컨테이너박스를 싣고 내렸다.
◇배 한 척에 200명 '생업' 달려
현대머큐리호는 부산을 기점으로 광양, 홍콩, 중국 광둥성 옌톈, 대만 카오슝, 중국 상하이를 거쳐 다시 부산에 돌아온 뒤 미국 시애틀, 캐나다 밴쿠버, 일본 요코하마를 거치고 부산으로 복귀하는 항해를 한다.
전체 노선을 한 바퀴 도는 데 41일이 걸린다. 이날 작업은 미주지역에서 싣고 온 컨테이너박스 250여개를 내려놓고 중국으로 갈 1200여개를 싣는 것이었다. 내용물은 주로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백화점용 잡화나 전자기기, 신발, 의류 등이라고 불가리아 국적의 보시노프 마리오 미하일로프 선장이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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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접안할 때부터 작업을 마치고 떠나보낼 때까지 도선사부터 시작해서 선박을 항구에 붙들어 매는 인원, 크레인 기사까지 총 200여 명이 매달린다. 컨테이너박스를 싣고 오는 트럭 기사는 제외된 숫자다.
당장 배 한 척이 취소된다면 이들의 생계에도 문제가 생긴다. 현대부산신항만은 상주 인원만 700여명이고, 협력사 임직원은 그 두 배다. 부산 전체로 따지면 해운업 종사자가 48만여명이다. 국내 해운업의 위기는 곧 부산 전체 경제의 위기인 셈이다.

◇ 해운업 경쟁력, 수출 경쟁력과 직결
해운업은 단순히 해운업 종사자들만의 산업이 아니다. 현대부산신항만이 속한 부산신항은 우리 수출의 최일선이다. 부산신항과 구항을 합치면 우리나라 수출용 컨테이너의 90% 이상을 처리한다. 현재 부산은 중국 닝보우와 물동량 기준으로 전세계 항구 가운데 5위를 다투는데, 항만 서비스는 물류비용에 영향을 미쳐 수출 경쟁력과 직결된다.
현재 부산신항을 중심으로 녹산국가산업단지와 신호일반산업단지, 화전일반산업단지, 부산과학일반산업단지 등 각종 산단이 조성돼 있다. 부산신항은 이들 산단의 입지상 가장 큰 장점이다.
이 가운데 녹산산단만 해도 지난해 기준으로 부산지역총생산의 15.3%, 제조업 생산의 24.8%를 차지할 정도로 지역경제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녹산산단 관계자는 "만약 국내 해운업체에 문제가 생겨 부산항만의 위상이 내려갈 경우 그 여파는 인근 산단에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경쟁력 면에서 머스크라인이나 MSC, CMA CGM 등 글로벌 대형업체에 뒤진다. 현대상선이 유동성 위기로 선박에 대한 투자는 꿈도 꾸지 못하는 동안 이들 업체는 해당 국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단위당 운송비용이 적게 드는 2만TEU급 초대형 선박을 확충했기 때문이다.
1만8000TEU 초대형선의 연료비와 운항비를 합치면 TEU당 294달러로, 현대상선이 보유한 최대 크기 선박인 1만3100 TEU 선박의 TEU당비용 418달러보다 30% 정도 낮다.
현대상선은 2016년 1만TEU급 컨테이너선 10척을 선박 주인에게 임대료를 주고 사용하는 '용선'방식으로 도입할 예정인데, 경쟁력을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현대상선은 부족한 경쟁력을 비용 절감과 영업력으로 만회해 흑자 전환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현대머큐리호에 같이 승선한 유승민 현대상선 화물감독은 "2016년은 글로벌 물동량이 크게 늘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금융적으로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낮은 유가 등 긍정적인 요인이 많다"며 "힘써 영업을 강화하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