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달빛에 건조시킨다"는 K-패션은 왜 안 나올까?

[기자수첩]"달빛에 건조시킨다"는 K-패션은 왜 안 나올까?

안정준 기자
2014.05.14 06:30

"얼마나 긴 시간동안 브랜드 스토리를 숙성시켰느냐는 해외 바이어들이 주문을 낼 때 가장 꼼꼼히 들여다보는 요소입니다"

최근 중국에서 열린 글로벌 구두 박람회에서 국내 A백화점 바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년 이상 된 장수 브랜드를 국내에서 찾기 힘들다는 점도 해외 바이어들이 의아해 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아직 세계화가 먼 'K-패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한국 패션산업이 시작된 지 5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K-패션이 진출한 해외국가는 중국 정도에 그친다. 그것도 고만고만한 브랜드가 저가 의류시장에 진출해 있는 정도다.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역사가 있는 스토리를 브랜드 가치의 척도로 삼는 선진 시장에 맞설 무기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는데도 왜 그대로일까? 패션 대기업 관계자는 "당장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단기 매출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바뀌는 유행에 맞춰 브랜드를 론칭하고 유행이 지나면 접는 일이 수 십 년째 되풀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좀 안 팔린다 싶으면 접고, 다시 새 브랜드를 내놓는 편이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은 패션업계의 정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브랜드 역사가 쌓일 리 만무하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에 따르면 전 세계 패션 브랜드의 평균 수명은 15년이지만 한국은 5년에 그친다. 지난해에만 한국에서 40여개 패션 브랜드가 일시에 사라졌다. 도매 시장 브랜드까지 감안하면 100개가 넘는 브랜드가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없다보니 할 얘기도 없다. "시장 환경에 맞춰 수익을 내는데 급급하다"는 이야기가 한국 K-패션의 정확한 현 주소다. "구두를 베니스 갯벌에 넣어 숙성시킨 다음 달빛에 건조시킨다"(벨루티), "여성들을 코르셋(체형 보정 속옷)에서 해방시켰다"(샤넬)는 스토리로 무장한 해외 브랜드처럼 도무지 할 내세울 이야기가 없다.

올해 한국 패션업계는 이랜드와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등 대기업을 필두로 다양한 브랜드들을 정리하고 SPA(제조·유통 일괄형 의류) 브랜드 중심의 사업 재편에 나섰다. 매주 단위로 급변하는 유행에 몸을 실어 '역사'보다는 '성과'를 내겠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성과가 필수지만 이것만으로 K-패션의 세계화는 멀어 보인다. 이제라도 한국 패션업계가 더 긴 안목으로 K-패션의 스토리를 다시 써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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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준 특파원

안녕하세요. 국제부 안정준 특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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