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원가보다 구현 기술과 브랜드 서사 앞세운 전략

명품이 '비싼 이유'를 설명하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금과 다이아몬드 대신 에나멜, 산업폐기물, 이케아 장바구니를 닮은 소재가 매대에 오르면서다. 심지어 값은 더 비싸졌다. 브랜드들은 소재 원가 대신 이를 구현한 기술과 서사를 값의 근거로 내세운다. '비싼 원재료=명품'이라던 공식이 깨지고 이제는 '값만 비싸면 명품'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2일 명품업계에 따르면 프랑스 하이주얼리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은 최근 대표 컬렉션 '알함브라'에 천연 원석 대신 핑크 에나멜을 넣은 신제품을 선보였다. 1968년 알함브라가 탄생한 이후 58년 만의 첫 시도다. 네잎클로버 모티프를 반투명한 핑크빛 에나멜로 채운 이 제품은 기존 인기 제품인 옐로 골드 마더오브펄보다 20만~150만원 더 비싸다. 5개 모티프 브레이슬릿을 예로 들면 마더오브펄은 850만원, 핑크 에나멜은 890만원이다.
반클리프 아펠 측은 에나멜이라는 소재 자체보다 이를 구현하는 '기술'을 강조한다. 핑크색은 17세기 골드 루비 유리 제조법에서 영감을 받아 자체 공방에서 수년간 연구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일부 소비자들은 에나멜 특유의 투명감과 기포를 두고 "플라스틱 같다" "레진 느낌"이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부쉐론은 금속이 아닌 소재로까지 범위를 넓혔다. 2022년 고속도로 제방에 쓰이던 산업폐기물 '코팔리트'를 유리화·불활성화해 주얼리로 재탄생시켰다. 지난해엔 검은 모래와 옐로 골드를 3D 샌드 프린팅으로 결합한 '콰트로 샌드 커프'를 내놨다. 여기에 알루미늄과 마그네슘까지 다이아몬드와 함께 세팅했다. 전통적으로 금과 다이아몬드를 고집해온 하이주얼리 업계에서 산업폐기물과 모래까지 소재로 끌어들인 셈이다.
가방 업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발렌시아가는 2017년 이케아가 99센트에 파는 장바구니 '프락타'를 닮은 250만원대 가방을 내놨다가 논란을 자초했다. 재질은 양가죽과 송아지가죽으로 달랐지만 CNN은 두 제품의 차이가 가격뿐이라고 꼬집었다. 2022년엔 쓰레기봉투를 그대로 본뜬 '트래시 파우치'를 230만원대에 선보였는데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뎀나 바잘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봉투를 만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소재와 판매가 사이 간극은 지난해 디올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 법원은 2024년 디올 이탈리아 핸드백 생산법인에 감독관을 임명했는데 하청업체가 개당 53유로(약 8만원)에 만들어 넘긴 가방을 디올이 매장에서 2600유로(약 384만원)에 판매한 사실이 확인되면서다.
명품업계가 값싼 소재를 끌어들이는 배경엔 '희소성' 기준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엔 최고급 가죽이나 희귀 원석 자체가 명품의 가치를 설명했다면 지금은 소비자 취향이 세분화하면서 원재료의 희귀성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금과 보석을 얼마나 많이 썼느냐에서 나아가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소재 개발과 가공 기술, 이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드는 브랜드 능력이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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