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중 무역갈등, 보호무역주의,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삼각파도 속에 자유무역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한 해 전망이 밝지 않다. 지난해 말 제네바에서 개최 예정이던 제12차 각료회의가 변이바이러스 확산으로 무기한 연기돼 엉킨 실타래를 풀 계기와 동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산적한 난제 속에 길을 잃은 WTO 입장에서는 오미크론 변이가 시간을 벌어준 셈이지만 여전히 뾰족한 해답은 없다. 다만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WTO의 미래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 전신인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때부터 국제 자유무역질서는 높은 회복 탄력성을 보여왔다. 크고 작은 풍랑에도 난파하지 않았다. "전간기(戰間期) 경쟁적 보호무역주의의 폐해를 반복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등장한 유럽경제공동체, 1970년대를 관통한 석유파동, 1980년대에 드리운 지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는 역설적으로 케네디, 도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의 원동력이었다. 2001년 개시 이후 큰 진전이 없다가 결국 좀비 상태에 빠진 도하라운드 실패의 한 원인도 위기의식 부재다.
지금 다시 위기의식이 몰려온다. '방 안의 코끼리' 중국 때문이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국제사회는 중국의 시장경제화를 촉진하고 그 방대한 내수시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에 환호했다.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과 중산층 증가는 '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자유민주주의로 이행을 담보할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그러나 그 기대와 희망은 이제 두려움이 됐다.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성공은 자유무역뿐만 아니라 국제질서 전반의 재편을 요구한다. 동시에 '중국문제'는 WTO의 전통 이슈 영역인 상품무역, 서비스무역,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 문제를 넘어 안보, 환경, 인권, 경쟁정책 등 전방위로 확산한다. 일부 무역 연계 이슈는 WTO 출범 당시부터 논의됐으나 개발도상국의 반발 등으로 진전이 없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슈 연계에 다시 주목한다. 논란이 된 탄소국경조정세가 대표적이다.
일부에서는 중국을 WTO에서 배제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WTO 규정상 한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의 이익을 '심각하게 무효화 또는 침해'하면 회원국에 보장되는 편익을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자발적으로 탈퇴하지 않는 한 강제퇴출은 어렵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처럼 WTO가 중국을 보이콧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중국의 WTO 지분을 고려할 때 이 역시 비현실적이다. 다만 미국의 압박이 심해지자 얼마 전 중국이 WTO 개도국 지위는 유지하되 농업과 금융 등을 제외하고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점은 일단 긍정적이다.
국제 무역질서의 최대 과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WTO 규범의 테두리에 넣는 일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만큼 난해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특히 올해 11월 중간선거 이후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CP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재가입을 통해 대중국 압박을 강화할 것이다. 중국도 이미 CPTPP 가입의사를 밝혔지만 WTO보다 더 까다로운 그 가입조건을 충족할 것으로 보는 이는 없다. 지금까지 무역원활화협정 외에는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지 못한 WTO에 CPTPP는 구원투수가 될 것이다. 전자상거래, 국영무역기업, 지식재산권, 환경, 인권, 노동, 경쟁정책 등 분야에서 국제무역규범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무릇 한국의 통상정책도 중국발 요소수대란 같은 단기 현안 중심의 대응뿐만 아니라 WTO의 위기와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응할 '용맹한 검은 호랑이' 전략을 갖추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