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필자의 전 직장인 한국산업은행 선배의 추천으로 한국 모험자본 시장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오랜 기간 M&A 시장에서 일했고 현재는 사모펀드 대표를 맡은 나에게 이번 자리는 한국 모험자본 생태계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패스트파이브 등 여러 건의 스타트업 투자와 산업은행 뉴욕지점장 시절 실리콘밸리 은행 관계자들과 교류 등은 모험자본 시장에 대한 내 나름의 견해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줬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미나 현장에서 나눈 논의 중 몇 가지 이슈에 대해 다시 한번 내 생각을 정리해봤다.
첫째, 벤처캐피탈 자금조달과 연기금의 역할이다. 최근 벤처캐피탈업계는 투자금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벤처캐피탈업계에선 연기금이 벤처캐피탈에 더 많은 자금을 출자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연기금은 가입자의 노후자금을 책임지는 기관이고 연기금의 본질은 가입자의 자산을 지키고 증식하는 데 있다. 수익률이 담보되지 않는 투자에 연기금의 자금공급을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연기금의 벤처캐피탈 출자확대는 사회적 합의와 투자수익률 제고방안이 선행돼야 한다. 쉬워 보이는 길은 정답이 아닐 확률이 높다.
둘째, 벤처투자 회수시장과 상장기준의 딜레마다. 한국 벤처생태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투자금 회수경로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미국처럼 활발한 M&A나 세컨더리(지분 재매각) 시장이 부재한 탓에 대부분 투자회수는 IPO(기업공개)에 의존한다. 이에 스타트업 상장기준을 완화하자는 목소리가 있지만 금융당국은 투자자 보호를 우선하며 신중한 입장이다. 올해는 특히 상장 적격성 심사강화와 부실기업 조기퇴출 등 시장구조 개선이 예고됐다. 같은 정부기관이라도 금융위원회와 중소벤처기업부는 관심사와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
셋째, 벤처대출(Venture Debt) 도입의 현실성 문제다. 벤처대출은 스타트업의 특허, 영업권, 미래 현금흐름 등을 담보로 하는 고위험 대출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등이 성공적으로 운용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후속투자의 불확실성이나 세컨더리 시장의 미성숙 등으로 대출금 상환기반이 취약하다. 산업은행이나 IBK기업은행 같은 정책금융기관이 이 역할을 맡는다면 손실보전과 성과평가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외국에서 성공한 모델이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잘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벤처투자 생태계의 성숙도와 리스크 관리체계 정비가 우선돼야 한다.
이런 현장의 고민은 "한국에 왜 실리콘밸리 같은 역동적 모험자본 생태계가 없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정부 주도로 벤처투자 시장이 양적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투자금 정체, 민간자본의 참여저조, 회수시장 미비 등 뚜렷한 한계를 보인다. 무엇보다 '벤처투자가 돈이 되는 시장'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하면 민간의 자율적 참여와 선순환 구조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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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각 생태계 구성원(스타트업, 투자자, 정부, 상장시장, 회수시장, 지원 인프라 등)의 입장에서 장애요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실질적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다양한 회수경로, 적극적인 민간 액셀러레이터, 글로벌 자본유입 등 촘촘한 생태계가 필요하다. 스타트업이 쿠팡, 크래프톤, 배달의민족 등과 같은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생태계의 어느 구성요소가 가장 장애가 되는지 파악하고 그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오는 6월3일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정부는 명분성 자금 나눠주기 방식의 벤처기업 지원정책에서 벗어나 민간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생태계 각 요소가 유기적으로 성장하도록 정책의 초점을 전환해야 한다. 벤처기업은 여전히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이다. 민간의 역동성이 살아있는 모험자본 생태계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