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권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대선후보 지지율 '부동의 1위'를 달려 온 박 전 위원장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오는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 레이스가 본격 막을 올렸다.
박 전 위원장은 탄탄한 대중적 기반과 함께 여의도 무대에서도 내리 5선을 거치며 정치력을 검증받은 인물이다. 올해로 만 60세. 올해 말 대선에서 당선되면 헌정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된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로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 사망 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한 바 있고, 거대 보수정당의 당권도 비교적 원만하게 행사하며 일찌감치 유력 대권후보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치적 유산 덕분에 떼어내지 못한 '유신의 딸'이라는 그림자, 특유의 정치 스타일 탓에 얻은 '불통(不通)'의 이미지는 박 전 위원장의 아킬레스건이다.
1952년 2월 대구에서 태어난 박 전 위원장은 부친 박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에 성공,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1961년 9살에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정치에 관한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조기교육'을 경험한 셈이다. 특히 박 전 대통령 집권시 나라의 비약적 경제발전을 지켜보며 투철한 국가관을 형성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대통령의 딸'이라는 위치는 그에게 아픈 개인사도 선물했다. 장충초등학교, 서울 성심여중·고,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1974년 모친 육 여사가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피살당해 급거 귀국한다.
또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서거했다. 당시 선친의 유고 소식을 접한 후 첫 마디가 "지금 휴전선은 어떻습니까" 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훗날 박 전 위원장은 "국가안보가 DNA처럼 몸속에 박혀 나온 조건반사적 얘기"라고 회상했다.
이후 청와대를 나온 박 전 위원장은 걸스카우트 명예총재와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학교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으며 부모의 유지 계승에 전념했다. 이때부터 1997년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가 박 전 위원장에게는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진 유일한 시기다.
박 전 위원장의 정치 '공백기' 18년 동안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평범하게 일반시민으로 살면서 박 전 대통령의 업적과 역사적 정당성 등을 지키는데 노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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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입문은 1997년 대선에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도우면서 부터다. 이후 46세인 1998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정계 입문 초반에는 '선친의 향수에 기댄다'는 비판적 시선도 있었지만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되며 개인적 정치력의 비약을 이뤘다. 특히 총재 경선에서 1위를 다퉜던 이회창 총재에 반발, 당 개혁안을 요구하며 탈당한 후 '미래연합'을 창당하기도 했다. 같은 해 평양을 방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만남도 연출했다.
2002년 재입당한 그는 불법대선자금 수수 사건과 고(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로 위기에 처한 당의 '구원투수'로서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혔다. 2004년 3월 당의 위기 속에 대표를 맡은 박 전 위원장은 국민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천막당사' 등 쇄신안을 감행, 한 달 후 4·15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다.
또 2년 3개월 대표 재임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 모든 선거에서 완승하며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2006년 지방선거 지원유세 때 '커터칼 테러'를 당했지만 병원 후송 뒤 첫 마디가 "대전은요?"였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원칙'과 '신뢰'를 바탕으로 당내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던 박 전 위원장은 2007년 17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8월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 첫 번째 대권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후 그는 다시 정치적 시련기를 겪었다. 당권을 장악한 당시 친이(친이명박)계에 의한 18대 총선 공천 '친박(친박근혜)계 학살' 논란이 불거지며 당내 '비주류'로 떨어졌다. 특히 2009년 미디어법 입법,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등에서 친이계와 충돌했지만, 오히려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정치적 소득이 있었다는 평가다.
박 전 위원장이 다시 여권의 주류로 부상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 후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퇴하자 당 안팎의 여론에 따라 사실상 비대위원장으로 추대 받았다.
악재 속에 등판했지만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야당의 전유물처럼 보였던 '경제민주화' 정책을 도입하는 등 강도 높은 쇄신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지난 4·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을 획득, 또 한 번 특유의 정치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대선 출마를 앞두고 이른바 비박(非박근혜)진영 대권주자들의 대선후보 경선 룰 논의에 대해 '비타협'으로 일관, '불통'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여전히 불식시키지 못했다. 지난 총선에서 전체적으로 승리했지만, 수도권 및 젊은층 표심을 얻지 못한 것도 대선을 앞두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목으로 꼽힌다.
△경북 대구(60) △장충초 △서울성심여중 △서울성심여고 △서강대 전자공학 학사 △퍼스트레이디 대리 △걸스카우트 명예 총재 △영남대 이사 △육영재단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15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부총재 △16대 국회의원 △한국미래연합 대표최고위원 △한나라당 대선 선대위의장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 △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18대 국회의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