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헐리즘 뒷이야기
사람과 동물, 가족과 사회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삶의 의미와 연대,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감동과 공감, 때로는 사회적 이슈까지 진솔하게 다루는 휴먼스토리 코너입니다.
사람과 동물, 가족과 사회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삶의 의미와 연대,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감동과 공감, 때로는 사회적 이슈까지 진솔하게 다루는 휴먼스토리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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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을 나왔다가 선선해진 공기에 움츠러들었다. '이젠 정말 가을이구나' 혼잣말을 했고, 다가올 추운 겨울을 떠올렸다. 하얀 입김과 흰 눈을 상상하면 으레 크리스마스 생각에 설레었었다. 올해는 맘이 좀 달랐다. 동네 고양이들 생각이 났다. 까망이, 하양이, 점박이, 얼룩이까지. 오가며 봤던, 기억나는 녀석들만 해도 꽤 됐다. 익숙한 거리를 구석구석 다니며, 겨울에 지낼만한 데가 있나 찾아봤다. 그리 마땅찮았다. 지난해 겨울엔가, 주차장에 자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던 게 생각났다. 날 두려워하는 눈빛이면서도, 바깥에 나갈 엄두도 못 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놀라지 않도록 살금살금 차에 타면서, 길 위의 작은 삶에 대해 안쓰러워했었다. 걱정만 컸고 정작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는 새 수은주가 영하 몇 도까지 곤두박질쳤고, 혹독한 바람이 불었고, 길 위의 많은 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봄 벚꽃이 필 무렵, 눈에 익었던 동네 고양이 몇몇이 안 보였다. '어디서 잘 지내
미세먼지의 계절이 오니, 잊고 있던 '흑역사'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지난 1월이었다. 여느 때처럼 미세먼지를 한 바가지 들이마신 날이었다. 난 뜬금없이 랩을 하기로 맘먹었다. 더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았다. 기사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까짓 못할 게 뭐 있냐 싶었다. 마미손에게 연락해 가르쳐달라고 했다. 핑크색 복면을 쓴, 그 사람 맞다. 찾아갔더니 그날은 복면을 거꾸로 쓰고 있었다. 뭐 어쨌거나 랩을 배웠다. 가르침은 단순했다. 일상적인 말로, 솔직하게 쓰란다. 래퍼명도 지어줬다. 마미손은 있으니 '크린랲(그 장갑 브랜드 맞음)'은 어떠냐고 했다. 그걸 '크린랩'으로 바꿔서 정해봤다. 랩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내자, 그런 의미로. 미세먼지를 주제로 랩을 썼고, 녹음도 했다. 기사가 나갔다. 차마 끝까지 못 들었단 독자가 많았다. 괜찮다고, 내년에 들으라고 권했다. 자꾸 귀에서 맴돈다고도 했다. 담배보다 끊기 어려울 거라 했다. 음원 앱에 올려달란 얘기도 있었다. 뭐 자랑이라고, 그
보니야, 오랜만에 네 사진을 봤다. 새 가족을 만났더라. 산책도 나갔더라. 널 예뻐해주는 이의 다리 위에 살포시 앉았더라. 활짝 웃고 있더라. 웃는지 어떻게 아냐고? 보면 안다. 17년을 함께 살다, 무지개다리로 떠나 보낸 아롱이가 너처럼 웃었었거든. 맘이 좋더라. 네가 이리 예뻐져서, 주인 품에서 웃고 있는 게. 기사 쓰는 것도 잠시 까먹고, 네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올해 3월9일, 강원도 강릉 유기견보호소에서 널 처음 봤다. 하얀색 고운 털에, 사막 여우처럼 귀가 쫑긋하고, 눈이 동그랗더라. 그리고 힐끔힐끔 날 보더라. 구하러 간 건데, 넌 많이 겁 먹은 표정이더라. 네 친구 하니랑 꼭 붙어있었어. 세상에 믿을 건 그 체온 뿐이라는듯. 그러고도 바들바들 떨고 있더라. 따스해지는 봄날인데, 너만 여전히 겨울인 것 같았다. 이해한다. 그 계절은 네게 참 혹독했었다. 지난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남들은 설레서 케이크도 사고, 거리엔 캐롤도 흘러나오고, 연인들은 손을 잡
땡볕에 나가기 싫다고 투덜댈 때였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 에어컨 바람을 붙잡고 있었다. 간신히 정류장에 발을 내딛었을 때 '우우웅'하고 전화 진동이 울렸다. 최진철씨, 7개월 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찬바람이 두 뺨을 얼얼하게 했던 지난해 12월, 그와 함께 폐지를 주웠었다. 잘 나가던 중식 주방장이던 그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 왼쪽에 장애가 남았다. 잘 걷고 말하는 일상적인 일조차 사치스런 추억이 됐다. 밥줄이 끊긴 뒤 붙잡은 게 손수레였다. 그와 하루 종일 폐지를 줍고, 165kg을 모았고, 1만원을 손에 쥐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그 한 장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돌아오는 길, 배고팠지만 떡볶이 한 접시를 사 먹지 못했다. 어렵게, 또 오래 붙잡았던 기사가 나갔다. 그를 돕고 싶어 댓글을 남겼다. 처음으로 부탁을 했다. 치아가 많이 안 좋은데 식사라도 제대로 하게 도와달라고. 치료해줄 분을 찾는 거였는데, 메일이 200통이나 쏟아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단돈
'좌파'냐 했다. '문재인 정권'을 위한 기사냐 했다. 중국 사드 보복 때는 왜 입을 닫았냐고 했다. 일본 부품 들어간 카메라는 왜 쓰냐고 했다. 한일청구권협정 때 무상으로 받은 3억 달러(당시 환율로 1080억원 정도) 얘기도 했다. 그 때 피해 보상을 다 받아놓고, 왜 국제법을 우리가 어기냐 했다. 개인 청구권은 없단 얘기도 했다. 그러니 감정적이란다. 지난주(20일) 나간 일본 제품 불매 체험 기사를 향한 비판들이다. 관심이 뜨거웠다. 한 명이라도 더 참여했으면 했었다. 다행이라며, 내 기사에 댓글을 달고 종일 들락거렸다. 꼼꼼하게 살펴봤다. 지지하는 응원도, 비판하는 의견도, 뜬금없는 얘기도. 암튼 한글로 써 있는 건 다 봤다. 한국 사람이 하는 얘기니까. 그게 이념이 다르든, 관점이 다르든 간에. 각자 삶이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아는 것도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필요한 때인 것 같아서. 특히 기사에 대한 비판은 상세히 들여다봤다. 기사 초반에 언급한 얘기들이
"이게 대체 뭔 소리야"하고 들어오셨다면 반은 성공입니다. "이게 기사야?" 하셨다면 몰입도가 더 높을테고요. 혹시 남성 독자라면 격하게 반갑습니다. 여성 독자도 환영하지만, 아쉽게도 판매 대상은 아니에요. 농담하는 거 아니니, 진지하게 끝까지 봐주세요. 남성용 브래지어를 팝니다. 가격은 0원입니다. 무료로 드리고요. 근데 왜 판다고 썼냐고요. 저도 바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건 마지막에 얘기할 예정입니다. 이게 무슨 압력밥솥도 아니고 뜸을 엄청 들이네요, 참. 상품 사이즈는 90B입니다. 남성 분이면 이게 뭔 말인지 잘 모르실 거예요. 앞에 숫자는 밑가슴 둘레고, A·B·C·D는 컵 사이즈에요. 이걸 어떻게 재냐면, 윗가슴둘레에서 밑가슴둘레를 빼면 됩니다. 색깔은 남색이고, 레이스도 달려 있어요(까끌 주의). 와이어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금속인데 가슴 모양 잡고, 받쳐주는 거예요. 쉽게 말해 '불편한 거'라고 생각하심 됩니다. 상태는 A급입니다. 지난해 여름, 8월22일과 2
"엄마가 암으로 입원하셨거든요. 한 달 간병비만 290만원씩 깨졌어요." 그 3개월이, 아들 A씨(45)에겐 아찔한 시간이었다. 쓰러진 모친을 보며 전전긍긍하던 것도 잠시. 수술이 끝난 뒤 돌아온 건, 그보다 더한 현실이었다. 간병비에 병원비까지 월 400만원에 달하는 돈을, A씨가 거의 다 부담해야 했다. 그에겐 동생이 있었지만 도와달라 얘기할 형편이 안 됐다. 모아둔 돈을 절반 정도 털어쓸 때쯤 다행히 퇴원하게 됐다. 그 때를 회상하며 그는 "엄마가 퇴원한 것보다, 조마조마한 지옥(地獄)에서 벗어난 게 더 기뻤다"고 했다. 그런 맘을 스스로 알아챈 뒤, 엄마 얼굴을 보니 참 슬펐단다. 맘 속에 품은, 그렇지만 차마 못했던 말이 많은 듯 했다. 환자 '보호자' 얘기다. 간병인 힘듦을 헤아렸던 체험 기사(22일자, 남기자의 체헐리즘 '치매 할머니 잠들자, 간병인은 비로소 울었다' 참조)엔, 그들 이야기가 더 많이 쏟아졌다. 22일 새벽, 기사가 나간 뒤 댓글을 빠짐 없이 꼼꼼히 읽
출근하기 싫다던 아내가 조용해졌다. 모처럼 평일 휴일이라, 회사까지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정지선에 멈춘 뒤 숨죽여 조수석을 바라봤다.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 모습, 그리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혹여 깰까 싶어, 조용히 흐르던 피아노 음악을 고요히 낮췄다. 초록불로 바뀐 뒤엔 가속 페달을 살며시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오른편에서 검은색 차량 한 대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속도를 안 내던 터라, 비교적 여유 있게 멈췄다. 그리고 다시 조수석을 바라봤다. 다행히 아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꽤 매너 있는 운전자(者)인척. 하지만 전혀 아녔다. 평소 내가 운전대를 잡을 때, 아내는 늘 조수석 위쪽 손잡이를 붙들었었다. 주로 내게 하던(지르던) 말은, "속도 좀 줄여", "천천히 좀 가", "급정거 좀 하지마", "멀미날 것 같아" 등이었다. "알았어"하고 늘 대답은 잘했지만, 맘처럼 잘 안됐다. 대뇌가 마비된 듯, 자율주행차에 앉은 듯, 머리와 손·
5월14일 밤 10시. 현관에 신발을 고이 벗어 놓았다. 그제야 여행이 끝났단 실감이 났다. 여행지(地) 어디선가 묻은, 흙먼지가 졸졸 따라와 있었다. 치우지 않고 잠시 그대로 뒀다. 그것 또한 여행의 여운(餘韻)이었다. 15시간쯤 숨 죽이고 있던 스마트폰을 켰다. 뒤늦게 확인한 메시지들에 답장을 했다. '오늘 스마트폰을 두고 여행을 다녀왔다.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고. '그랬구나'란 맞장구와, '잘 다녀왔냐'는 물음과, '고생했다'는 격려를 본 뒤에야 미안했던 맘이 놓였다. 씻으러 들어가 옷을 벗고 나니 켜켜이 쌓인 여행의 흔적들이 드러났다. 와온(臥溫) 해변 바닷바람이 휘감아 남긴 몸의 짠내와, 순천만 정원 햇볕 덕에 그을린 팔과 목덜미, 그리고 사서 고생하느라 등에 말라 붙은 땀까지. 아직 찬물은 시린 5월이라, 미지근한 물로 개운하게 다 쓸어 내렸다. "여행은 어땠느냐"는 아내의 말에 "그냥 좋았다"며 웃고 말았다. 그러자 "기사 쓸만한 게 있겠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취재
밤 9시쯤, 동네 학원가를 서성거렸다. 학원들이 꽤 몰려 있는 곳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앳된 얼굴이었다, 많아야 11~12살쯤 됐을까. 몇몇은 장난을 치고, 몇몇은 수다를 떨며 학원 버스에 올랐다. 그중 한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신분을 밝혔다. 멍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이 고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짧게 물었다. 나: "혹시 몇 살이에요?" 아이: "12살이요." 나: "학원이 이렇게 늦게 끝나요?" 아이: "네, 매일매일 그래요." 나: "다니는 거 힘들죠?" 아이: "네." 나: "얼마나요?" 아이: "그냥 지옥 같아요." 예상보다 센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 고맙다 하니, 인사를 꾸벅한 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자그마한 체구에 무게를 알 법한 축 쳐진 가방. 이제 고작 12살, '어린이'라 불리고, 한
새벽 5시, 눈이 번쩍 떠졌다. 알람도 안 맞췄는데, 심지어 토요일인데. 체헐리즘 기사를 예약한 시간은 새벽 6시30분, 그 직전엔 나도 이리 괜히 싱숭생숭했다. 라이브(Live) 공연을 앞둔 가수 맘이 이럴까. 기사 취지는 고스란히 알아줄까, 댓글은 뭐라 달릴까, 취재는 잘한 걸까, 더 필요한 말은 없었나. 꼬리에 꼬릴 무는 생각들. 지난주 토요일(20일)엔 맘이 더 쓰였다. 그날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체험 기사가 나갈 예정이었다. 흰지팡이를 빌려, 눈을 감고 바깥을 다녀봤었다. 아늑했던 집안과 동네는 낯설고 무서워졌다. 그렇게 며칠 보행 연습을 하고,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를 다녀왔다. 따스한 봄이니까, 시각장애인도 나들이를 가고 싶을 거란 생각에. 그 정도는 홀로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여정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파김치가 됐다가, 감은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현실을 너무도 모르고 살았단 생각에. 그걸 잘 알리고 싶은 맘에,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