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속오늘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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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96 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2년 9월 26일, 대구 와룡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한 남성이 사람 유골을 발견했다. 발견된 유골은 11년 6개월 전 실종된 5명의 아이, 이른바 '개구리 소년'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이 아이들은 '도롱뇽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남긴 채 와룡산에서 사라졌다.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건이었지만 아이들의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영구 미제사건으로 기록됐던 시점이었다. 유골이 발견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개구리 소년' 사건의 전말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경찰의 주장이 있었으나 부검 결과, 타살이라는 추정이 내려졌으며 범행도구는 용접 망치가 유력하게 거론됐다. ━"도룡뇽 알 찾으러 간다" 아이들의 마지막 말━ 사건이 발생한 날은 1991년 3월 26일로 지방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아침 8시께 성서국민학교(현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우철원(6학년), 조호연(5학년), 김영규(4학년), 박찬인(3학년)
2017년 9월 25일.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3년 전 필리핀에서 현지인들에게 돈을 주고 60대 부동산 임대·투자업자 허모씨를 살해하도록 청부한 혐의(살인 교사)로 한국인 신모씨(구속 당시 43세)를 구속했다. 해외에서 킬러를 고용해 한국인을 피살한 교사범이 구속된 첫 사건이었다. 신씨는 2014년 2월 18일 오후 7시40분쯤 발생한 살인 사건을 교사한 혐의를 받았다. 사망한 허씨는 필리핀 팜팡가주 앙헬레스시의 한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쏜 45구경 총알 6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허씨는 일행 3명과 함께 호텔 인근 식당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당시 상황은 주변 CC(폐쇄회로)TV에 고스란히 담겼고,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에서 수사를 시작했다. ━빌린 5억원 도박으로 탕진…돈 못 갚게 되자 살인 청부━허씨는 2012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신씨의 제안으로 5박 6일 필리핀 관광을 왔다가 변을 당했다. 이날 호텔 인근 식당으로 허씨를 불러낸 것도 신씨
2015년 9월 24일(현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이슬람 최대 연중행사이자 성지순례인 '하지(Hajj)' 도중 사람들이 한 장소에 과도하게 밀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사우디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 사고로 769명이 사망했고 934명이 다쳤다. 그러나 AP 통신 등 일각에서는 사망자가 정부 발표보다 약 3배 더 많은 2000명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해당 집계만 놓고 보면 1990년 메카 터널 압사사고(사망자 1426명) 이래 발생한 최악의 사고다. ━"넘어지고 깔리고 반복"…메카의 '참상'━하지는 이슬람력 12월 7~12일에 진행되는데 우리 시간으로는 9월에서 10월로 넘어가는 닷새간이다. 무슬림 5대 의무 중 하나이기 때문에 전 세계 신도들은 일생의 한 번쯤 성지순례를 위해 해당 기간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한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까지 사우디에는 총 240만명 이상의 순례객이 방문해왔다.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만큼 역사적
판다하면 '푸공주(푸바오+공주)'만 기억하는가. 사실 푸바오 이전에 한국에 리리와 밍밍이 있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번식에 성공, 사랑을 듬뿍 받은 푸바오 전에 한국을 가장 먼저 찾은 판다는 리리와 밍밍이다. 이들 덕분에 푸바오가 준비된 할부지, 강철원 사육사를 만날 수 있었고 국내에서 크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리리와 밍밍은 1994년 대한민국에 온 최초의 자이언트 판다다. 4년간 한국에서 사육되다가 1996년 2월 중국으로 돌아간 부부(?) 판다다. ━ 1994년 9월, 국빈 대우 받으면서 한국에 발 내디딘 '리리'와 '밍밍' ━자이언트 판다인 리리와 밍밍은 1994년 9월23일, 중국 판다 외교의 일환으로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다. 희귀종인 판다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공항은 북새통을 이뤘다. 판다 한 쌍은 '한중 수교 대사'라는 타이틀과 함께 국빈급 대우를 받으면서 입국했다. 판다를 마중 나온 환영인파가 태극기를 흔들었고, 판다 전용 차량이 마중 나왔다. 용인 자연농원(현재 에
1983년 9월22일 오후 9시33분쯤 대구 중구 삼덕동 미국 문화원에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미국 문화원 건물이 파손된 것은 물론이고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인명피해도 있었다.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1980)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1982)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가방 제보자의 안타까운 죽음…"용의자는 경북대 학생들?"━ 사건 당일 오후 9시쯤 영남고등학교 1학년 허병철군은 방과 후 미국문화원 인근을 지나다 문화원 정문 앞에 놓인 가방 2개를 봤다. 이를 수상히 여긴 허군은 상대적으로 작은 가방을 들고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경찰서로 향했다. 김철호 순경을 만난 허군은 미국문화원 앞에 다른 가방이 또 있음을 알렸고 두 사람은 문화원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9시33분 허군은 김순경에게 "바로 이 가방이다"라고 말하며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펑'하는 강력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고 허병철군은 현장에서 즉사, 김철호 순
2018년 9월21일. 대전고등법원에서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된 49세 남성 A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징역 18년형을 확정했다. A씨는 직장 동료 B씨(당시 52세)와 말다툼 도중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는 재판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료 험담했더니 화해하란 직장 동료에 앙심 품고 살인━ 2018년 3월19일 대전시 중구에서는 A씨가 직장 동료이던 피해자 B씨를 만나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 대흥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A씨는 대화 도중 다른 직장 동료인 C씨를 언급했다. B씨는 A씨에게 화해할 것을 종용했고 결국 두사람은 말다툼을 벌이다 몸싸움으로 번졌다. 20일 새벽까지 번진 싸움에서 A씨는 분을 이기지 못해 3kg에 달하는 둔기로 B씨의 얼굴과 머리를 수차례 내리치고 신체 일부를 밟았다. 이로 인해 B씨는 머리와 목 부위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1985년 9월 20일. 3박 4일 일정의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행사가 막을 올렸다. 한국전쟁 발발 35년 만에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날 남한 측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예술공연단은 판문점을 통과해 평양으로, 북한 측 방문단은 서울로 향했다. 방문 인원은 사전 합의한 대로 남북한 각각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지원인력 20명 등 151명이었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이산가족 상봉은 상대측이 마련한 시간과 면회 장소에서 이뤄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4년의 회담 끝에... 마침내 합의된 이산가족 상봉━ 이날 행사를 개최하기까지 남북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화의 첫 단추는 이산가족 찾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우리 측이 먼저 끼웠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는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회담을 북측에 제의했고, 북한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1972년 8월 30일 평양
"인육을 먹은 게 사실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1994년 9월19일, 연쇄살인 조직 지존파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서에서 취재진과 마주한 지존파 일당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심지어 미소를 띠며 "어머니도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한이 된다", "부자를 더 못 죽여 한이 된다" 등 반인륜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모두 20대로 이뤄진 지존파는 1993년 7월 일용직 노동자였던 김기환의 주도로 결성됐다. 지존파는 부유층에 대한 증오심을 앞세워 일면식도 없는 행인 5명을 살해했다.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해 증거를 안 남겼으며, 사체는 소각하거나 먹어치웠다. ━배신한 조직원도 살해…지존파, 어떻게 결성됐나━지존파 두목 김기환(당시 26세)은 1968년 3월 전남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세살에 부친을 잃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15살엔 모친마저 중풍으로 쓰러지는 등 불우한 가정사를 겪었다. 이른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건설 현장으로 내몰린 그는 절망과 좌절에 빠졌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언젠가 이런 날이 와서 내가 한 짓이 드러날 줄 알았다." 영화 '살인의 추억' 실제 범인 이춘재가 결국 자백하며 남긴 말이다. 역사상 최악의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진범 이춘재는 심리전에 휘말린 뒤 DNA라는 명백한 증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DNA가 나왔다니 할 수 없겠다"는 말도 했다. 이춘재가 처음부터 범행을 인정한 건 아니다. 수사기관이 DNA를 통해 진범을 특정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2019년 9월18일, 프로파일러가 부산교도소에서 이춘재를 처음 마주했을 땐 입을 꾹 다물었다.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사건, 30여년 만에 찾은 실마리 ━ 장기 미제였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는 2019년 새 국면을 맞았다. 그해 여름, 과학수사 기법이 발전한 덕분에 경찰이 보관하던 증거물 속 DNA와 일치하는 인물을 특정하게 됐다. 일치한 인물이 바로 이춘재였다. 그리고 그 해 9월18일 경찰은 이춘재를 접견하면서 재수사를 개시했다. 그는 처제 살인 사
2020년 9월17일. 부부싸움을 하다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고 딸에게 중상을 입힌 50대 강모씨에게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창원지법 진주지원 형사1부(재판장 박무영)는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강씨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가족을 상대로 한 범행이 잔혹하고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을 참작하면 엄벌이 불가피하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재판부는 우발 범죄였다는 강씨의 주장을 모두 기각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진정한 참회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잠이 들어 무방비 상태에 있던 가족을 끔찍하게 살해했고, 이 사건으로 살아남은 딸은 식도가 손상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등 범행이 계획적이고 잔혹하다"고 지적했다. 강씨는 재판부의 질타에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야산으로 도주한 강씨…나흘만 검거━사건은 그해 3월1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씨는 이날 오전 6시쯤 진주 상평동의 한 주택에서 미리 준비한 흉기로 잠들어있던 자신의 아내(51)와 아들(14)을
2020년 9월16일. 여행용 가방에 9살 의붓아들을 가둬 숨지게 한 계모 A씨가 1심에서 징역 22년을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인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1부(채대원 부장판사)는 "피고인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며 검찰이 A씨에게 적용한 살인죄를 그대로 인정했다. 선고를 내리던 채대원 부장판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A씨는 의붓아들 B군 때문에 남편과 사이가 나빠져 친자녀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학대 강도가 높아졌고, 살인에 이르렀다. B군은 마지막까지도 '엄마'라고 부르는 A씨에게 구해 달라고 애원하다 '아, 숨!'이라고 외치고 참혹한 결과를 맞았다"며 울먹였다. 이어 "범행 수법이 극히 잔인하고 어떠한 연민조차 찾아볼 수 없다"며 "다수 제출한 반성문에서조차 아이가 잘못해 훈육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변명만 했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참회하는지 의문"이라고 질타했다. ━"숨 안 쉬어진다" 말에…헤어드라이어 불어넣었다━사건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는 그해 사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처로 꼽힌다. 전쟁 초반부터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했다. 한국군은 전쟁이 발발 한 달이 겨우 지난 8월 초,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더 이상 밀릴 땅도 없었다. 더 물러섰다가는 동해와 남해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다. 연합군은 이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950년 9월 15일, 전세를 뒤집을 결정적 한 방을 날렸다. 74년 전 오늘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UN군이 열세에 있었던 전황을 단숨에 뒤집었다. 이후 북한은 정전까지 과거의 위상을 한 번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날 인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한국군, 초반 약세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 전쟁 개전 이후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붙였지만 이곳에서 전선이 굳어졌다.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조선인민군 정예부대의 전투력도 크게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 실제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