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속오늘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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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96 건
2018년 8월 21일 오전 9시31분. "손들어!" 경북 봉화군 소천면사무소에 들어선 70대 남성의 짤막한 외침과 함께 네 번의 총성이 울렸다. 면사무소 직원들을 향해 길다란 엽총을 쏜 건 4년 전 봉화로 귀촌한 김모씨(당시 77세)였다. 김씨가 엽총을 손에 넣게 된 건 사건 2시간 전인 이날 오전 7시50분쯤이다. 김씨는 경북 봉화군 소천파술소에 보관 중이던 엽총을 출고했다. 이 엽총은 이탈리아에서 제조된 산탄식으로, 5연발 총기였다. 이후 그는 곧바로 자신의 그랜저 차를 타고 평소 갈등을 빚어온 이웃인 스님 임모씨(당시 48세)가 있는 암자로 향했다. 임씨를 기다리던 김씨는 오전 9시13분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임씨를 향해 엽총을 쐈다. 어깨에 부상을 입은 임씨는 인근 숲으로 피했고, 김씨는 2발을 더 쐈지만 빗나갔다. 김씨는 임씨와 상수도 문제 및 쓰레기 소각 문제 등으로 여러 차례 갈등을 빚어온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민원을 파출소와 면사무소에 제기한 바 있
"처음부터 죽일 의도는 없었다. 혼만 내주려고 했는데 죽이게 됐다" 2021년 8월 20일. 미제(未濟)로 묻혀 있던 이승용 변호사 피살 사건이 22년 만에 새 국면을 맞았다. 유력한 용의자 김모(57)씨가 한 방송사와 인터뷰하면서 22년 만에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김씨는 자신이 몸담았던 폭력 조직에서 이 변호사의 살인을 교사했다고 주장했다. 범행에 쓰인 흉기를 정확히 묘사했으며, 이동 동선 등을 설명하기도 했다. 김씨는 수사당국의 눈을 피해 22년 동안 숨어 있었다. 난데없는 인터뷰만 안 했다면 이 변호사의 죽음은 영원히 미제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왜 구태여 사건을 다시 들춘 것일까. ━차에서 숨진 채 발견된 변호사…사건은 미궁 속으로━ 피해자 이승용 변호사는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1984년 검사로 임명돼 서울지검과 부산지검을 거쳤다. 동기로는 채동욱·김진태 전 검찰총장,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홍준표 대구시장 등이 있다. 이 변호사는 1992년 검찰을 떠나
공항을 떠난 지 7분. 기체 후미 부분에서 불길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장 모하메드 카화이터는 비상사태를 알리고 공항으로 기수를 돌려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켰지만, 비행기는 착륙 후에도 계속 이동해 활주로 끝 유도로까지 간 뒤 멈췄다. 비행기 엔진은 계속 돌아가다가 비행기가 정지한 지 3분15초가 흐른 후에야 멈췄다. 실내는 이미 불길에 휩싸인 상태였고 안에 있던 승객 287명, 승무원 14명이 전원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한국인 4명도 있었다. ━무사 착륙했지만…승객·승무원 '전원 사망'━1980년 8월19일 오전 6시32분. 사우디아라비아 항공 163편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 칼리드 국제공항을 이륙했다. 기장은 모하메드 카화이터, 부기장은 사미 압둘라 하사닌이었다. 이륙한 지 7분이 지났을 무렵, 기체 후미의 화물 적재 칸에서 연기가 난다는 경보가 울렸다. 기체 가장 후미 쪽에 불길과 연기가 보였고 평화로웠던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승객들은 연기를 피해 밀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UN군이 시야 확보를 위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은 후계자 수업을 받던 김정일이 이같이 말했다. 김정일의 명령을 받고 며칠 뒤인 1976년 8월 18일 오전. 벌목 작업을 지도하던 미국인 UN군 장교 2명이 조선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단순히 미국과 북한의 문제를 넘어 UN에 무력도발을 한 대도발 사건이라는 점에서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가지치기 조언하며 화기애애했는데…도끼 휘둘렀다 ━ 1976년 8월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다. 유엔군 측 3초소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유엔군은 가장 위에 있는 5초소(OP 5)에 올라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3초소와 5초소 중간에 위치한 미루나무가
"저와 르윈스키의 관계는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옳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저 혼자 책임져야할 부분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예를 보여준다고 봅니다. 제 아내를 포함한 여러분들에게 잘못을 지절렀습니다. 정말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1998년 8월 17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TV로 방영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자신이 전 백악관 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와 '적절하지 못한 관계'를 가졌다고 시인하고 가족, 친구와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이로써 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은 백악관 인턴 사원이었던 르윈스키와 폰섹스, 성관계 등을 가진 사실을 부인했으나 독립검사 케네스 스타의 집요한 추적 끝에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이 사건은 '지퍼게이트'로 불린다. ━대통령 비서실장 인턴직원과 사랑에 빠진 대통령━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1995년 7월. 대통령 비서실장의 인턴 직원으로 백악관에 입사한 르윈스키는 클린턴 대통령
1977년 8월16일. '로큰롤의 황제' '로큰롤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했다. 그는 정크푸드와 진통제, 수면제, 안정제에 절어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자신의 저택 그레이슬랜드의 화장실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엘비스의 사망 이후 사망원인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하지만 그의 주치의는 엘비스의 진짜 사망원인을 '만성변비'라고 주장했다. 부검기록 결과에 따르면 엘비스의 모든 기관들은 망가져 있었다. 엘비스는 죽기전, 7개월 동안 9000정(pill)에 달하는 먹는 약, 주사제를 처방받았다 한다. 이렇게 많은 약을 처방했던 의사(DR. Nick)는 엘비스가 죽은 후 비윤리적 약물처방 이유로 기소당하기도 했다. 엘비스가 그 많은 약을 먹었던 이유는 과도한 욕망, 스트레스, 과로, 우울증, 두통, 어지럼증, 불면증 등 여러 질병과 증상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엘비스의 평소 식습관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말년엔 치즈버거를 달고 살 정도였다고. 여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10분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제29주년 광복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연단에 올라섰다. 각계 인사 1000여명은 객석에 자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권총을 발사했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풀썩 단상 의자에 쓰러졌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수술을 받았으나 향년 48세로 사망했다. 총구를 겨눈 채 연단을 향해 계속 달려가던 23세 청년을 객석에 있던 공무원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오전 10시30분쯤 경호원은 현장에서 넘어진 청년을 체포했다. ━공산주의 심취한 재일교포…VIP인 척 행사장 통과━박 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누다 실패해 육 여사를 숨지게 한 23세 청년의 이름은 문세광이었다. 신장 180㎝, 몸무게 80㎏의 거구에 지독한 근시이며 권총 사격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였다. 그는 1972
"야, 방이 너무 좁아. 방 좀 바꿔줘!" 1986년 8월14일 밤 10시30분. 서울 강남의 유명 룸살롱 '서진회관'은 그날따라 북적였다. 광복절인 다음 날 휴일을 맞아 모든 방은 손님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중 17호실에서 조직원 고용수의 석방을 축하하려 모인 '맘보파' 일행은 종업원을 불러 "방이 너무 좁다"며 다른 방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빈방이 없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종업원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이후 옆방에 있던 '서울 목포파' 일행과도 시비가 붙으면서 패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총 4명이 살해되며 상황은 집단 살인 사건으로 번졌다. ━아수라장이 된 복도…전국구 조직 vs 신출내기 조폭━당시 서진회관은 지금의 9호선 신논현역과 언주역 중간에 위치한 대형 룸살롱이었다. 17호실에 머무른 맘보파 일행은 당시 교통사고를 낸 뒤 복역하던 중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조직원 고용수의 석방을 축하하려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맘보파는 '조폭계의 전설'
1955년 8월 13일. 서울 적십자병원에 한 20대 남성이 입원했다. 2시간여 수술을 마친 그는 남자 병실이 아닌 여자 병실로 옮겨졌다. 국내에서 처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조기철 씨였다. 이로써 그는 한국에서 '성'(性)을 바꾼 첫 인물이 됐다. 수술을 무사히 마친 조씨는 보름간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곧장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2층에 있는 미용실로 향했다. 난생 처음 펌 시술을 받은 조씨는 당시 유행이었던 웨이브 단발머리로 변신했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활짝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당시 언론은 "수술 후 묘령의 처녀가 된 조양은 그동안 입원실에서 신의 섭리를 고요히 생각해 오다가 여성이 된 후 처음으로 거리에 나왔겠다"며 자신의 선택으로 성(性)을 바꾼 조씨의 모습을 전했다. 여성의 자태를 한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파마를 하고 분을 바르고 루주도 칠하니 비로소 틀림없는 여성이 되었다", "처녀다운 한줄기 수줍음을 감추고 있었다", "파마로 더욱 이뻐 보이는
"교도소에 갔다 왔더니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친척과 친구도 나를 전과자라고 냉대했다. 끗발 나게 살고 싶었는데…" 1975년 8월13일 새벽 0시, 전남 광산군(현 광주 광산구)의 한 외딴집에 20대 괴한이 숨어들었다. 괴한은 자고 있던 노부를 습격해 낫으로 살해했다. 노부의 부인은 절굿공이로 때려 중상을 입혔으며, 집에서 손전등 하나를 훔쳐 도주했다. 괴한은 이후 두달여 동안 16명을 더 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됐다. 유영철 이전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남긴 연쇄 살인범 김대두의 이야기다. ━빈농의 자식, 연쇄 살인범이 되다━ 김대두는 논 4마지기와 밭 1000평을 가진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를 대도시의 이름난 중학교에 진학시키려고 했을 만큼 교육열이 높았지만, 김대두는 학업에 뜻이 없었다. 그는 큰돈을 벌고 싶다며 일찍이 생업 전선에 나섰다. 하지만 농촌 출신 저학력자에 기술도 없고, 키도 160㎝로 왜소한 그에게 사회는 녹록지 않았다. 열등감에 빠진 김대두는 범죄의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거북이하고 둘이서 헤엄치기 시합하믄 누가 이길 것 같노?" "조오련!"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에 언급됐듯, 전 수영선수인 고(故) 조오련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서 바다거북이 만큼 빠른 존재였다. 수영복이 없어서 사각팬티를 입고 대회에 나갔던 소년은, 압도적인 수영 실력으로 어느 순간 주목받기 시작해 50여개의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는 등 '아시아의 물개'로 우뚝 섰다. 무엇보다 그는 은퇴 후에도 대한해협 횡단, 도버해협 횡단, 울릉도~독도 횡단 등 나이를 무색게 하는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귀감이 됐다. 그러나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기념해 재도전을 준비하던 2009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지고 말았다. 향년 57세. ━수영선수 꿈 위해 자퇴 후 상경…아시안게임 접수━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조오련은 어린 시절 고향 실개천과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영선수라는 꿈을 키우기 시작한 그는 1968년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2000년 8월 10일 새벽 2시쯤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 부근에서 오토바이를 몰던 다방 커피 배달원은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참고인 조사에 불려간 배달원은 자신이 본 것을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미 그는 살인범이 돼버린 상태였다. ━경찰서 아닌 모텔 데려간 경찰…3일간 잠 안 재우고 고문━살인 사건 최초 목격자인 다방 배달원 최모씨(당시 15세)는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 "현장에서 남자 2명이 뛰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급기야 경찰은 최씨를 인근 모텔로 데려간 뒤 전화번호부를 던져주며 "진범을 찾아내라"고 강요한다. 이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폭행을 가했다. 이후 다시 경찰서로 데려간 경찰은 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은 채 또 폭행을 가했다. 강압 수사를 견디지 못한 최씨는 결국 자신이 범행했다며 허위 진술을 했고 재판에 넘겨지게 됐다. ━결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