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칼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금융·기업법 전문가인 김화진 교수가 국내외 경제, 금융, 기업, 사회 이슈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 전달하는 코너 입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금융·기업법 전문가인 김화진 교수가 국내외 경제, 금융, 기업, 사회 이슈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 전달하는 코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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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외교라는 모순된 말보다 국제정치의 본질을 더 잘 나타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함대는 1827년 그리스에서 영국 채권자들의 돈을 받아다 주었고 1840년에는 중국에 영국 상인들의 아편도 팔게 해주었다. 1866년의 셔먼호 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 1875년의 강화도 사건은 조선의 대외통상 개시와 개국으로 이어졌다. 제국주의 시대가 종식된 이후로 노골적인 포함외교는 사라졌으나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아직도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책의 연장에 불과하고 군사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경제력이 바로 외교력이다. 현대판 포함외교에는 포함이 아닌 칼빈슨호와 같은 항모와 토마호크 미사일이 동원된다. 칼빈슨호의 1년 운용비용은 약 4조원으로 북한의 1년 국방비와 같다. 지난 4월 미국이 시리아에 59기를 발사한 토마호크는 1기에 15억원이다. 국제질서의 핵심은 힘, 즉 강력이다. 주권국가들은 자국의 정책을 국제사회에 적용하거나 타국의 그러한 시도에 대응하는 데 힘을 사용하며 정
19세기 세계 외교사는 해양세력이 되고자 한 러시아를 영국이 집요하게 저지한 역사다. 아시아에서는 그런 영국에 일본이 기쁘게 협조했다. 뤼순과 다롄에 세 들어 있던 러시아 함대가 1904년 2월 일본에 격파당하자 발틱함대가 일곱 달이나 걸려 대한해협에 도착했는데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참패했고 로마노프왕조가 몰락하는 전조가 되었다. 러시아 해군이 궤멸되자 독일이 부상했고 1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를 성립시킨 나라는 강력한 해군을 구축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미국이다. 미국은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영일동맹을 폐기하고 아시아에서 영국을 대체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미국은 고립주의와 지리상, 그리고 경제공황 때문에 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아시아는 러시아를 꺾은 일본의 독무대가 되었다. 누가 말했듯이 한반도는 일본에 들이대는 대륙의 비수 형상이다. 일본은 그 비수를 무디게 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만주와 한반도를 손에 넣으면 일본은 비수를 거꾸로
한반도 역사에서는 항상 주변 강국들의 대외정책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지금이 특히 그렇다. 그런데 대외정책은 정권에 따라 큰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각국 정치 지도자들이 전임자들이 한 일을 새기고 있어서다. 예컨대 중국 지도부는 최고 40만명의 인명손실과 대만 흡수 포기를 대가로 치르면서 한국전쟁에 개입한 선대의 결정이 갖는 의미를 잊지 않고 있다. 우여곡절은 있을 수 있어도 중국이 결코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입장이 중요한데 미국의 경우 보수와 진보가 대외정책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현 트럼프행정부를 이해하려면 미국 역대 보수정권의 대외정책을 잘 살펴보고 트럼프행정부가 그 맥락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파악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이 어렵고 특이한 언행을 구사하며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실용주의자다. 그러나 역대 보수정권의 대외정책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선거에서 공화당의 전폭적 지원을 받지
서구에선 헤지펀드의 경영간섭과 적대적 M&A(인수·합병) 비용이 최근 들어 현저히 낮아졌다. 2014년부터 특히 활성화한 ‘울프팩’(Wolf Pack) 덕분이다. 회사의 지배구조를 변경하고자 하는 다수의 헤지펀드가 공식적인 그룹을 형성하거나 집단적인 의사를 드러내지 않고 주도적인 펀드를 중심으로 같이 행동하는 경우 이를 울프팩이라고 부른다. 울프팩은 북미대륙에서 20세기 이전 여행자들에 의해 많이 관찰된 현상으로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유명한 다큐멘터리영화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유보트들이 무리를 지어 연합국의 상선을 공격할 때 사용한 방법을 지칭하기도 한다. 늑대는 시선 교환과 실제 싸움을 통한 완력으로 무리의 두목을 정하는 사회성이 있는데 늑대무리를 칭하는 울프팩이 헤지펀드의 세계에 비유적으로 도입되었다. 공동의 의사를 가진 주주의 지분 합이 5% 넘으면 공시해야 하는 의무는 울프팩에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각자 알아서 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공동의
대학들이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화여대처럼 ‘국정농단’이란 특수한 사건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고 총장을 임명하지 못한 몇몇 국·공립대학의 사례처럼 대학 운영에 정부가 특수한 역할을 하는 우리 사회의 특징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곳도 있다. 일부 대학은 제2캠퍼스, 분교 문제로 논란과 어려움을 겪는다. 서울대학교는 시흥캠퍼스 문제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서울대 문제는 서울대가 우리 고등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 단순히 제2캠퍼스 문제로 보는 데 그쳐선 안 될 것이다. 시흥캠퍼스 문제는 이미 학생이 대학운영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총장 선출제도를 개선하는 것을 포함한 대학 지배구조 문제로 확대됐고 대학의 기업화나 캠퍼스의 상업화 같은 현상이 더 이상 모종의 패러다임 정립 없이는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재 세계 대학들은 시장과 경쟁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 토론토대 존스 교수의 지적처럼 신자유주의는 사회에서 대학이 수행하는 역할과 대학의 정체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은 국민으로부터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공직자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대학교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교수가 공직자 등의 범위에 포함되면서 의도치 않은 것으로 보이는 어색한 일들이 일어난다. 학생이 교수에게 캔커피를 건네면 안 된다는 것은 상징적인 사례고 실제로 대학의 자치와 학문의 자유 침해가 일어난다. 예컨대 교수가 학회에 나가 토론하는 것까지 사전신고하게 하고 위반하면 제재한다. 심지어 사례를 받지 않아도 신고해야 하는데 이는 법의 취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 학회 토론은 공직자들에게는 가끔 하는 부차적인 일이지만 교수직에는 중요한 일부다. 직무관련성이라는 불확실한 개념 때문에 의대 교수와 법대 교수의 행동이 다른 평가를 받는데 이는 법이 교수를 학자가 아닌 공직자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김영란법은 우리 대학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총장·학장 선출이나 교수임용 과정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앞으로 대학
미국에는 회사법이 50개가 있다. 이중 단연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델라웨어주 회사법과 판례다. 델라웨어는 바이든 부통령의 상원의원 시절 지역구다. 가장 선진적인 회사법과 명망 있는 전문 판사들이 있어 나머지 49개 주의 회사법이 항상 델라웨어를 의식해서 발달한다. 델라웨어 회사법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967년이므로 이제 50년이 되었다. 50주년을 계기로 미국 학계에서는 회사법의 미래와 발전방향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진행된다. 미국 대기업의 절반 이상이 델라웨어에 적을 두고 있어 그 법에 따라 운영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67년 그 회사법이 경영진의 권한을 강력히 보장하는 내용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주주는 회사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미국 회사의 사실상 주역은 경영진과 이사회다. 이렇게 해야 주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 그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그러나 해를 거듭해 갈수록 주인이 아닌 경영진이 진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회
서울대학교에선 학교에 관한 중요한 신문기사와 함께 교수들이 쓴 신문 칼럼을 클리핑해서 매일 교내에 e메일로 전송한다. 이 서비스는 비교적 인기가 높은 것 같다. 전공이 전혀 다른 교수들에게 내 칼럼에 대한 인사를 받은 적이 많다. 일부 단과대학 홈페이지에는 소속 교수들의 칼럼을 정리해서 소개해놓았다. 몇 군데 둘러보니 다른 학교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런데 왜 학술논문은 그런 방식으로 널리 소개하지 않는가? 오히려 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칼럼은 전문적인 내용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짧게 정리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시한 것이라 사회에서 널리 읽히고 그 결과 영향력이 크다. 그렇다면 왜 교수들은 학술논문을 쓰는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신문에 칼럼을 쓰면 될 터. 칼럼은 분량이 제한된다? 그러나 학술논문이 어차피 널리 읽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논문을 작성하다 보면 종종 회의가 든다. 과연 몇 사람이 이걸 읽게 될까? 내가 쓰는 법학논문이 법원의 재판에서 직접 참고가 되고 사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