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1898년 오늘(7월 30일) 독일 제2제국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타계했다.
◆프로이센의 재상 취임부터 독일의 통일까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그의 나이 47세 때인 1862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 의해 발탁되어 왕국의 재상이 되었다. 의회에서의 취임사에서 그는 "지금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겨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64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손을 잡고 덴마크와 전쟁에 나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두 공국의 주권을 덴마크 국왕으로부터 빼앗았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아직 중세 봉건제의 잔재가 남아 있어 덴마크 국왕은 덴마크의 국왕임과 동시에 독일 연방의 일원인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공작이라는 형태로 독일 안에 일부 영토를 동군연합 형태로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에서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영국의 반대를 무력화하고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그의 화려한 경력의 시작에 불과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승전하자마자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갈등이 시작됐는데 이는 전리품인 두 공국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갈등을 봉합하려고 하기는 커녕 오히려 키우는 정책을 택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면서 그는 프랑스의 중립을 확보하려 애썼는데, 초반에 중립을 지키다가 전쟁에 교착 상태에 돌입했을 때 개입하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에게 여지없이 농락당했다. 1867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프랑스가 개입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6주만에 프로이센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프로이센은 이제 북독일 전체를 얻었다.
◆대내외적인 안정을 추구한 이른바 '비스마르크 체제'의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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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얻지 못한 나폴레옹 3세는 허둥댔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다음 전쟁을 염두에 두면서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를 이용했다.엠스 전보 사건으로 인해 1870년 마침내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전쟁에 돌입했으며, 프로이센은 이 전쟁에서 다시 승전했다. 1871년 1월 비스마르크는 그의 주군 빌헬름 1세를 점령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황제로 등극시켰다.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 제국 황제가 되면서 그의 지위 역시 프로이센 재상에서 독일 재상이 되었다. 또한 독일 제국은 남독일을 얻어 독일 전역을 통일했다.
이후부터 약 15년간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열렸으며, 이 때의 유럽 체제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독일 제국은 원하던 모든 것을 얻었으므로 더 이상의 변화는 독일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전사한 병사의 눈을 감겨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전쟁을 쉽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며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
비스마르크는 막 통일을 이룬 독일 제국의 안착(소프트 랜딩)을 위해 대내외적인 안정 기조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대내적으로는 1883년 건강보험법, 1884년 산재보험법, 1888년 연금보험법을 마련해 사회주의를 선제적으로 제압하고 독일의 사회보장체제를 정비하여 국내 정치를 안정시켰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과 재보장 조약, 3제 동맹, 양국 동맹, 3국 동맹 등의 복잡한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해 영국과 프랑스를 고립시킴으로써 독일 제국의 안보 환경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비스마르크 체제의 한계와 후계자들에게 남긴 파멸적 유산
문제는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능란하고 교묘한 책략들이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야심만만한 빌헬름 2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등극하자 비스마르크는 점차 힘을 잃고 1890년 실각하고 말았다. 제갈량은 그를 알아주는 유비 밑에서만 그 재략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실감한 비스마르크는 1896년 청일전쟁에서 대패한 뒤 실의에 빠져 독일을 방문해 "중국을 부활시킬 계책을 달라"는 이홍장에게 "군주의 신임을 얻는 것이 먼저"라며 "군주의 뜻을 거슬러서는 어떠한 정책도 펼칠 수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럽 외교사 1815-1914'를 저술한 로이 브리지와 로저 불렌은 "지나치게 교묘한 비스마르크의 책략은 후계자에게 파멸적인 유산을 남겼다"고 저술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를 개별적으로 독일에 외교적으로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먼저 러시아를 이탈시켜 프랑스와 동맹하게 하였으며, 이후에는 영국과 이탈리아도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는 참화를 불러왔다.
폴 케네디는 그의 명저 '강대국의 흥망'에서 "비스마르크의 모든 조약들은 체약국들을 프랑스로부터 떼어놓아 어느 정도 독일에 종속되게 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그런대로 가까운 장래 동안 유럽 강대국들의 평화를 보장해주는 듯이 보였다"면서도 "1880년대에 그가 엮어낸 조약들은 지나치게 복잡한 체제 때문에 영속적인 안정성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