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재일교포 장명부, 일본서 사망… 국내 최다승·최다패전 투수로 기록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한국의 '전설의 투수'로 불렸던 장명부의 말년은 쓸쓸했다. 그는 2005년 56세에 일본 와카야마 현에서 홀로 운영하던 마작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마약 중독. 그가 죽기 전 남긴 짧은 글귀는 그의 롤러코스터 같았던 삶을 대신했다.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에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한시즌 30승)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던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외롭고 초라했다.
그는 1950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다.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던 장명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첫해에는 번외 투수로 입단했지만 2년째 되는 해에 1군으로 승격해 활약했다. 3년 후 그는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해 7승을 올리는 등 주요 선수로 활약한다.
장명부는 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해 선수 절정기를 맞이한다. 1978년, 1980년 15승을 기록했고 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정상에 오르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82년엔 3승을 올리는 등 저조한 실력을 보이며 은퇴했다.
그는 은퇴한 이후 새로운 기회를 한국에서 찾게 된다. 당시 프로야구 실력이 일본에 비해 떨어졌던 한국에서 그에게 '러브콜'이 온 것이다.
장명부는 이듬해인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한다. 그는 입단할 당시 30승을 달성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삼미의 허형 사장은 그가 30승을 달성할 경우 1억원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장명부는 거짓말처럼 그 시즌에 놀라운 기록들을 달성하기 시작했다. 83시즌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놀라운 기록이 나왔다. 그는 이틀에 한번 선발로 출전해 한 시즌에 427이닝이란 전무후무한 기록도 달성했다. 최약체였던 팀은 전·후기리그 모두 2위에 올랐다. 장명부는 그 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그가 시즌 시작 전 시범경기 때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쉬운 공을 던지면서 타자들을 일일이 테스트해 봤던 것이다. 이미 분석이 끝난 장명부는 시즌 내 펄펄 날았다. 그래서 장명부에게는 '속을 알 수 없는 너구리'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독자들의 PICK!
하지만 영광은 잠시뿐이었다. 그와 구단주가 약속한 보너스 1억원을 둘러싼 약속 때문이었다. 구단주가 1억원에 대해 '나몰라라'했고 장명부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기에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연봉계약까지 하게 되면서 그는 사기가 꺾이게 된다.
실적 부진이 계속 이어졌다. 다음 시즌 장명부는 45경기에 등판, 13승 20패 7세이브에 그쳤다. 청보가 삼미 구단을 인수한 1985년에는 25패를 기록했다. 단일시즌 역대 최대 패배다. 1986년 장명부는 실적 부진으로 퇴출당한 후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가 은퇴한다.
전문가들은 그가 삼미로 이적하면서 무리하게 경기를 뛴 것이 결국 악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이틀에 한번꼴로 경기를 뛰면서 그의 기량과 체력이 크게 저하됐을 것이란 분석이다. 장명부 또한 '30승이 나를 망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로도 잠시 활동한 그에게 또 한번의 불행이 닥쳤다. 1991년 5월 필로폰 사용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이 사건으로 한국프로야구협회(KBO)에서 영구제명되고 한국에도 영원히 입국할 수 없게 됐다.
그렇게 한국에서 잊혀졌던 그는 13년이 지난 후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2004년 SK와이번스가 첫 개막전에서 그를 초청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년 뒤 2005년 4월13일 자신의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1986년 은퇴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이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때 왜 30승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20승만 했어도 충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