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보수와 진보, 둘 다 겁난다.

지금까지 대선 후보자간 이념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때로는 이 논쟁이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겉으로나마 지역대결구도를 탈피해 후보자간 이념 검증이 중요 사안으로 등장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원칙적으로 어떤 이념적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느냐는 일상의 경제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가 노동자인가 기업인인가, 재산이 많은가 적은가 등 그가 처한 경제적 위치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보수, 진보 논쟁은 국민이 이를 얼마나 절실하게 인식하는가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과 오랜 유교적 관습, 이런 것들이 우리를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게 하는 조건이다. 또 생활력이 강하고 경쟁심이 강한 기질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각자 실리를 추구하는 것을 우선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역대의 독재적 정권들은 우리사회를 더한층 보수적으로 흐르게 했다.
DJ정부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제3의 길을 주창한 영국의 사회학자 안소니 기든스는 DJ정부를 중도좌파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DJ는 취임하자마자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IMF의 신자유주의적 개혁플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진보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추진한 수준의 재벌개혁과 구조조정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으로 이해당사자간의 다툼 성격은 있으되 보수나 진보와 같은 이념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햇볕정책을 고집하는 것이나 복지를 확충하는 노선 또한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크게 진보적이랄 것도 없는 편이다.
다음 정권은 어떻게 될까? 현재의 후보자들은 보수냐 진보냐를 놓고 상대방이 정권을 잡으면 그 성향 때문에 나라에 큰일이나 날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기본 성향으로 보아 그 이념의 차이와 간격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보수와 진보가 극렬하게 대립하면서 발전해온 세계사를 고려해 볼 때 현재의 보수?진보 논란은 후보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의 사활이 걸릴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그 간격은 좁지만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견제하면서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생산성을 높여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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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진보 대립에 앞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들은 너무나 많다. DJ정부에서 우리에게 혼란을 주었던 것은 졸속으로 추진된 의료개혁과 교육개혁, 그리고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 스캔들이었지 이념의 강요나 갈등이 아니었다.
필자의 느낌에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적 정치인들은 선입관을 앞세우고 많은 것을 너무 급하게 뜯어고치려 했고, 기존의 많은 보수적 정치인들은 보수라는 개념을 권위와 부패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를 분하게 만든 것은 인권이 존중되지 않고 부패가 심하며 졸속 정책들로 국민을 우왕좌왕하게 만든 것이었지, 보수와 진보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권력이 남용되지 않고, 부정부패가 없고, 재벌의 횡포가 없고, 정책당국자들이 사심 없이 정책을 추진한다면, 지금 우리 단계에서 보수냐 진보냐가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하단 말인가? 보수든 진보든 진짜 겁나는 것은 일단 칼자루를 잡고 나면 그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생활 속의 작은 인간관계든 ‘견제와 균형’이야말로 이념을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