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엔과의 동침

[시평]엔과의 동침

송의영
2003.01.16 15:35

[시평]엔과의 동침

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국제경제학에도 `원죄설'이라는 것이 있다. 개발도상국들이 자국 화폐의 달러 환율이 요동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많은 양의 단기자금을 달러로 차입한 `원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그랬던지 외환위기 전까지 원화의 가치는 시장의 조화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달러에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물론 외환당국은 개입을 계속 부인하지만.

 

세기가 바뀐 뒤 윈-달러 동조성이 약화되는가 싶더니 작년 봄 이후 원/달러 환율은 높은 변동성을 보이는 반면 원/엔 환율은 놀라운 안정성을 보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환거래자들이 우리 상품의 대일 경쟁력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선물환 시장의 오묘한 조화일 수도 있다. 또한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최근의 원-엔 동조화는 아시아 통화 블록에 대한 논의나 촛불시위의 이미지와 겹쳐 묘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유야 어떠하든 원화가 원죄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발생했던 수많은 국제금융의 비극은 그 태반이 엔/달러, 마르크/달러 환율의 엄청난 변동성에 원인을 두고 있다. 기축통화간 환율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달러에 고정되어 있는 화폐를 가진 개발도상국의 수출과 경제는 달러의 등락과 더불어 요동칠 수밖에 없다. 80년대 초 한국이 거의 외환위기에 내몰렸던 것도 미국의 고금리 인한 달러의 강세가 주요 원인 중 하나였고, 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상당부분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달러 폭락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97년 외환위기도 미국의 IT 호황에 기인한 달러 강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80년대의 남미, 최근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 통화 동맹에 대한 논의가 계속 활기를 띄고 있다.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통화 동맹은 원화의 엔화 동조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시아 통화 동맹을 통하여 무역이 신장되고 경제가 달러의 부침에 좌지우지되는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차 엔/달러와 유로/달러 환율이 안정됨에 따라 아시아 지역의 통화가 전 세계의 통화와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고 이는 결국 세계통합을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엔/달러 환율이 계속 출렁이는 한 이러한 기대는 실현되기 힘들다. 엔/달러 환율의 불안 속에서 엔화와의 안정적인 관계는 달러와의 불안정한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아시아 무역은 안정적인 환율로 도움을 받겠지만 달러 권과의 무역은 환율 불안정으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엔과의 결속은 경기변동의 폭을 줄이지 못하고, 경기변동의 순서만 뒤바꿀 것이다. 과거와는 반대로 달러가 강할 때 경기가 뜨고, 달러가 약할 때 경기가 침체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직은 우리의 대외거래의 대부분이, 심지어 일본과의 거래의 상당부분도 달러로 결제되는 상황에서 엔화와의 결속은 이익보다 더 많은 손해를 가져올 수 있다.

 

80년대와 90년대에 그랬듯이 2000년대에도 엔/달러 환율의 안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미국정부는 이 문제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일본의 엘리트들은 일본 금융기관의 골병이 대체의학으로 자연치유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엔과의 장기적인 동침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엔과 달러 사이에서 원화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줄 때만 우리 경제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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