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필드매뉴얼을 만들어라

[광화문]필드매뉴얼을 만들어라

이중수 정보통신부장
2003.06.23 12:50

[광화문]필드매뉴얼을 만들어라

대기업에 다니는 40대 후반의 한 간부는 좀처럼 자기 업무의 기록을 회사에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일종의 '생존의 법칙'이라고 했다. 그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내가 하는 일을 세세하게 기록해두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 기록들이 결국은 내 업무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거든요"라고 설명했다. 

10여년전 과장 시절, 아직까지 컴퓨터 사용이 일반화되지 않던 그때, 개인적으로 학원을 다니면서 컴퓨터 활용법까지 익힌 그였다.

당시 그는 컴퓨터에 자신이 맡았던 기획 업무를 파일로 남기는 작업을 벌였다. 워드로도 모자라 스프레드시트(로터스 등)와 데이터베이스(DB+)도 동원하고 네트워크 이론을 배우며 보조 저장장치의 활용까지 익혔었다. 그러던 그가 이 일을 중단한 것은 영업부서로 옮기면서부터.

 

어느 날 회사 오너의 친척이 기획담당 상관으로 오면서 그는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동안 만든 파일과 데이터를 활용해 새 전입 상관에게 깔끔하게 브리핑을 했지요. 상관도 좋아하는 듯했지만 그게 화근이었어요."

 

그가 만든 기록들을 본 전입 상관은 그의 자리에 자기와 같이 일해 온, '코드가 맞는' 새 담당자를 들여 앉혔다. 그 기록만 있으면 그 자리에 누굴 앉히더라도 일하는데 어렵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이곳저곳으로 부서를 옮기면서 '자기만의 기록'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런 꼼꼼한 기록들을 토대로 업무의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게 된 그는 그 이후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간부 자리에 올랐다. 회사가 자기의 가치를 높게 사준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례는 단지 기업에만 있는 일은 아닌 듯하다. 기업은 물론이고 공무원 조직과 시스템화되지 않은 대다수의 우리 사회 모든 조직들에 이같은 '고질병'이 뿌리박혀 있다고 진단한다. 기업은 최근 컴퓨터 조직관리와 체계적인 관리 도구(Tools)를 도입해 이같은 병폐를 줄이고 있다.

 

기업의 성패 여부는 얼마나 그 회사를 운영하는 매뉴얼이 잘 만들어졌느냐에 달려 있다. 제품에 대한 매뉴얼도 중요하지만 업무의 속성과 문제해결 방법과 절차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둔 야전교범(Field Manual)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필드매뉴얼이 없으면 매번 그 자리에 오는 사람은 해당 업무의 운영방식과 절차를 새로 배워야 한다. 그러니 전체적인 조직혁신이나 새로운 연구개발(R&D) 과제는 늘 뒤쳐지게 마련이다. 뒤쳐지는 정도가 아니라 ABC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낭비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이 매뉴얼을 만들어가는 전문인력들을 홀대하는 조직운영이 이뤄진다면 어느 누가 필드매뉴얼을 만들어 놓을까.

더욱이 우리의 조직과 공직은 한 부서에 전문인력을 오래 놔두지 않는 풍토여서 최고경영자(CEO)나 고급 간부들이 바뀔 때마다 전문성을 우선시하기 보다는 중요 보직에 기용되려는 '아부꾼'들만 생존해나간다.

 

올들어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사회 문제들도 이같은 필드매뉴얼이 갖춰져 있지 않아 혼란을 초래한 경우가 많았다. 교육행정정보망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서도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적 발언'으로 밀어부치려다 말을 수차례 뒤바꿔 혼선을 초래했고, 파업과 같은 노동계 현안에서도 일을 처리해가는 절차나 업무 내용에 대해 당국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우와좌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국가 대계의 큰 틀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각 세부 사항들을 미리 매뉴얼로 만들어 필드에 전파하는 작업들이 우리에게는 아직도 낯설어 보인다. 필드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으면 '얼치기' 이념이나 탁상공론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야말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일류 경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데 바로 전문가들이 필요한 것이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