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서로 다름의 예찬

[광화문]서로 다름의 예찬

방형국 편집위원
2009.07.03 10:06

언제부턴가 '다른이의 나와 같음'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이든 나와 다른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입맛이 당긴다.

막걸리 탁배기를 앞에 놓고 마주앉은 친구가 나의 생각과 다름에 서운해 하고, 나의 계획을 따라주지 않는 아내에 속으로 슬퍼하고, 나의 기획에 반대하는 동료를 마음으로 미워하던 어리석음에서 늦게나마 뛰쳐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게 좋은 것은 다른 세상, 다른 경지, 다른 경험, 다른 생각, 다른 환경, 다른 입장 등을 두루 `공짜`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치열할 수 있어서 좋고, 더 정교할 수 있어서 좋고, 더 준비할 수 있어서 좋다.

`통일`(統一)이 이념처럼 모든 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시절이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중국집에서 직장상사가 자장면을 시키면 모든 부하직원들도 자장면으로 `통일`하던 시절이었다. 정부가 마늘 양파를 심는 게 좋을 것 같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마늘 양파를 심었다가 값이 폭락하는 파동도 수없이 겪었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하라는 것의 반대로 해야 한다는 불신풍조를 낳기도 했다. 남북통일을 향한 뜨거운 염원이 일상의 생활과 평범에 영향을 끼쳐 의식의 단순화, 획일화를 낳은 것이 아닌가 싶다.

같다는 것은 참 편리하다. 의견집약과 판단, 결정이 빨라 효율적이다. 속도전에서는 더 할 것 없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편리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다. 선택의 부재와 다양성의 함몰, 다른 문화와 다른 시도에 대한 폐쇄, 변수에 대한 대안미비 등으로 입체화된 높은 완성도가 있을 수 없다.

다른 것은 낯설다. 낯설어 불편하다. 의견을 모으느라 늦어질 수 있다. 그래서 비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롭다. 같느라 부족할 수밖에 없는 부분과 단점을 채워줄 수 있다. 자(雌)가 있으면 반드시 웅(雄)이 있고, S극이 있으면 반드시 N극이 있듯이 다른 것과 다른 것이 함께 있을 때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다른 의견에 `분열`이니 `갈등`이니 하고 몰아치듯 동원되는 단어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면 `대승적 수용`이니 `구국적 결단`이니 따위로 요란하게 수식되는 구(句)가 슬프다.

거대한 조직이나 기업에 획일화된 지시와 명령만 있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문화가 없다면 아홉번이나 꺾어진 양의 창자보다 복잡하고 구불구불하며, 스펙트럼이 다양한 21세기에 어떤 경쟁력을 갖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분열, 갈등, 벼랑끝 승부, 대승적, 구국적 따위의 글을 봐야 신문을 읽은 것 같고, 책을 읽은 것 같고, 뉴스를 들은 것 같은 우리들의 인식이다. 큰 소리로, 강한 어투로, 자극적인 언어로 내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것과의 교류는 눈꼽만큼도 인정하지 않고 철통방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조미료와 맵고 짠 자극적인 양념에 길들여져 원재료의 깊은 맛을 잃어버린 입맛이다.

'정유위조무위'(靜有威躁無威)라던가. 조용하게 있음에 권위가 찾아오고, 시끄럽게 함에 권위가 무너진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다른 것을 폄하하고, 따돌리고, 왜 나와 다르냐고 눈 밖에서 내버리면 그때는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 나의 다른 것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된다.

이런 때 다른 이, 다른 것과의 소통은 비로소 궁해야 통하는 `궁즉통`(窮卽通)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왜 다른지 조용히 관조하고, 들여다 보고, 생각하며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때야 비로소 나의 다른 가치가 무게감을 갖는다. 내 것만을 주장하고, 내 생각만을 고집한 채 다른 것에는 눈 감고, 문을 닫기에 세상은 너무 다양해지고, 이해관계는 복잡해졌다.

여의도에는 애초부터 `다름의 교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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