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헌 KOTRA 실리콘밸리 무역관장 인터뷰

“하청(下請), 갑을(甲乙), 산하(傘下), 이런 말을 익숙하게 쓰는 문화에서 실리콘밸리 같은 곳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IT밸리 같은 건물 짓는다고, 창업자금 지원한다고 실리콘밸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실리콘밸리는 지역을 일컫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물보다 그 안에 들어갈 문화, 자본회전보다 사람들간 관계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권중헌 KOTRA 실리콘밸리 무역관장은 “창조경제라는 목표는 정말 중요하지만, 실현방법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위치한 실리콘밸리무역관은 실리콘밸리를 찾는 한국인들이 꼭 한번씩 들르는 곳. 지난해에만 5400여명이 방문했다. 실리콘밸리내 웬만한 한국관련 IT모임은 이곳에서 열린다. 실리콘밸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한국인 가운데 한명인 그로부터 실리콘밸리를 혁신허브로 만든 비밀인 그 문화에 대해 들어보았다.
권 관장은 “실리콘밸리가 세계적인 IT허브, 혁신허브가 된 핵심은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상호작용과 협업"이라면서 "그런데 한국은 이 1번부터 막혀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의 비결은 인재나 자본과 같은 재료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런 재료들을 어떻게 배합하는가라는 레시피, 즉 문화의 경쟁력인데 한국에는 여전히 배타적인 문화가 지배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에서도 독특한 실리콘밸리 문화의 생성배경을 서부개척시대 경험에서 찾았다.
“서부개척시대를 각개약진의 시대라고 하지만, 동시에 공통점이라고는 별로 없는 사람들간 협업의 시대이기도 하다. 100여명씩 그룹을 지어 서부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과 인디언의 위험에 맞서 협업하고, 병들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대장장이와 목수 등 각자 자신의 재능으로 공동체를 도왔다. ‘나홀로 개척자’인 사람은 없었다. 협력의 인큐베이터였다. 이런 전통이 실리콘밸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
그러면서 권 관장은 “실리콘밸리에서는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다음날 사업을 함께 하는 동료가 된다. 인종에 크게 게의치 않는다. 성공한 창업가들은 후배 창업가를 위해 시간을 내는데 인색하지도 않다. 벤처투자자들은 어떻게 하면 수익을 실현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창업가들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권 관장은 “반면 한국은 정주(定住)의 역사이다. 외부에서 인재들이 들어오고, 잘 되어서 나가기가 쉽지 않다”면서 “이런 문화를 쉽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아시아 인재들이 와서 함께 혁신을 만들 수 있도록 비자시스템 등 제도적 정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인도와 중국 출신들이 실리콘밸리 혁신의 중추적 역할을 하듯이, 한국도 아시아의 창업허브가 되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권 관장은 이어 “사람들이 더 많이 마주치고 배우면서 함께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네트워킹이라는 말은 ‘끼리끼리’라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혁신은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나고 교류하면서 나오는 것이 혁신이다. 한국이 새로운 혁신을 만들려면 무슨무슨 ‘IT밸리’ 등과 같이 단순히 건물들을 모아놓는 것보다 더 큰 개념의 문화적 기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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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한국이 창업을 통해 혁신을 하기 위해서는 창업자들의 생활패턴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면서 “창업가들을 위한 공간이라면서 센터나 밸리를 만들어놓고 창업가들을 입주시키는 것보다, 도시 전체를 네트워킹이 빈번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문화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등 공공기관에서 ‘이 시설은 테크 창업자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오히려 창업자들을 다른 문화로부터 격리를 시킬 수 있다. 사막에 떨어진 꽃 한송이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어느 외진 곳에 창업가들이 일할 수 있는 빌딩 올린다고 혁신이 숨 쉬지는 않는다는 것.
권 관장은 최근 토니 셰이 자포스 창업자가 라스베가스 구 도심에서 진행중인 도시 실험 ‘다운타운프로젝트’가 좋은 모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이곳을 방문했던 그는 “이곳의 철학은 창업가와 예술가, 스몰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마주치고 배우도록 하면서 도시 전체가 혁신의 스타트업이 되자는 것”이라면서 “실리콘밸리의 전통적 하드웨어 모델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보다, 해당 지역의 조건에 맞게 사람들 간 더 많은 교류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즉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권 관장은 “실리콘밸리를 만들겠다고 엔지니어링하듯 접근해서는 안된다”면서 “정부가 설계하고, 자금을 집행하고, 창업 숫자를 목표로 하고, 그래서 어느 순간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창업 숫자를 늘리기 위한 정책위주로 간다면 오히려 미궁으로 빠질 수 있고, 또한 정책이나 자금을 너무 잘게 쪼개버리면 시너지를 발휘하기가 힘들다”고 덧붙였다.
그는 “창조경제를 위한 정부의 역할은 플레이그라운드와 룰을 만들어주는 것이지, 방향성과 목표스케줄까지 정부가 만들 수는 없다”면서 “사람들간 연결이 일어나는 토대를 만들어주면 그 다음 단계의 진화는 플레이어들이 알아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