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상황 10년전 돌아간듯… '경제=면도' 미루면 초췌 명심

살다보면 처음 가 보는 곳인데도 이미 여러 번 왔었던 것처럼 익숙한 곳이 있다. 어떤 때는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마치 몇 번이나 되풀이했던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일도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데자뷔(旣視感)이라고 한다.
수백 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 해’라며 들뜬 마음으로 맞이한 2007년 새해가 시작된 지 한달이 가까워지면서 데자뷔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경제주권을 IMF(국제통화기금)에 넘겨줘야 했던 정축국치(丁丑國恥;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빗댄 말)를 10년만에 또 겪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의 경제상황을 보면 데자뷔가 허무맹랑한 착각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작년말부터 시작된 ‘외화 퍼내기’ 노력이 대표적이다. 재경부는 1인당 해외부동산 취득한도를 100만달러에서 300만달러로 확대한 데 이어 해외펀드의 주식차익에 대해 3년 동안 세금을 물리지 않기로 했다. 넘치는 달러로 원/달러환율이 하락(원화가치 상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문민의 정부’시절인 1993년부터 ‘외환자유화’를 내세워 달러 퍼내기를 유도했던 것과 거의 닮은꼴이다. 요즘 중국 인도 베트남 등에 투자하는 해외주식펀드에 자금이 몰리는 쏠림현상도 당시 종합금융회사와 증권사를 중심으로 러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고위험-고수익 채권을 향해 무분별한 투자가 이뤄졌던 것과 비슷하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느닷없이 제기된 ‘개헌논의’도 당시의 ‘한국은행 독립운동’과 닮아 있다. 요즘의 개헌논의는 대통령이 제기했고, 당시의 한국은행 독립운동은 재경부와 한은 사이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현안과 동떨어진 이슈에 ‘정책역량’을 낭비하면서 정책리더십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운명의 시계가 외환위기를 향해 돌아가고 있던 1997년. 1월부터 소쩍새 울고(한보철강 부도), 봄 소나기가 거세게 쏟아지며(진로 부도), 폭풍우가 몰아치고(기아차 부도), 태국에서 시작된 통화위기의 쓰나미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휩쓸고 대만을 거쳐 한국 상륙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정부(청와대는 물론 재경부와 한은을 포함한 광의의 정부)는 “한국은 펀더멘털이 강하기 때문에 위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허언(虛言)장담만 난무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밤 TV연설을 통해 “종합주가지수가 1400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인 나라의 경제가 파탄이고 위기냐”고 밝혔지만 상황은 녹녹치 않다. 비록 기업 부채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56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미니 쓰나미’라고 할 수 있는 2003년의 ‘카드대란’ 때 가계부채보다 40%나 더 늘어나 있다. 소비주체인 가계의 부채는 상황이 악화됐을 때 현금흐름(Cash Flow)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생산주체인 기업 부채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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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와 달리 지금은 25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를 운운하는 것은 쓸데없는 기우이며, 불필요한 불안심리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주가지수 1400과 국민소득 2만달러는 경제가 성장세를 유지하는 과정에서는 호재이지만, 성장이 정체되고 하락으로 돌아설 때는 오히려 잠재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금융정책은 크리스탈과 같다. 조심스럽게 다듬으면 화려한 빛을 내지만, 서투르게 다루면 그만 깨지고 만다. 그저 깨지기만 한다면 더 이상 쓰지 못하는 아쉬움만 달래면 된다. 하지만 크리스탈은 부서지면 사람을 다치게 만든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경우도 있다.
경제는 면도하는 것과 같다. 오늘 면도했다고 해서 내일 하지 않으면 얼굴이 덥수룩해진다. 오늘 경제가 좋다고 해서 내일과 모레도 좋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60, 70년대 10대 기업 중 지금까지 10대 기업으로 남아 있는 기업이 몇 개에 불과하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시속 100km로 변하는 디지털 글로벌 세계에서 10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사람과 기업과 국가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오늘의 안락함에 사로잡혀 50km 이하로 속도를 떨어뜨리는 순간, 우리는 제2의 경술국치와 정축국치를 되풀이 할 수 있다.
‘예고된 위기는 없다’고 한다. 상황이 좋지 않아 위기가 예상될 때는 위기가 오지 않도록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때문에 위기는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날이 오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응책을 마련해 실행하는 게 책임 있는 리더가 할 당연한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