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과천 관가에서 고위 공무원들의 '보신계명'이 회자됐다. 종종 사고의 진원지가 됐던 민원인에 대한 대처요령으로 '일정을 메모하자. 단 둘이 만나는 자리는 피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이 계명은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현대자동차 계열사의 부채탕감 로비와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에서 출발했다.
변 전국장을 법정에 세운, 유일한 직접 증거는현대차(471,000원 ▲5,500 +1.18%)를 대신해 뇌물을 제공했다는 김동훈 전 안건회계법인 대표의 진술. 김씨는 수사 과정에서 변 전국장에게 3차례에 걸쳐 거액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변 전국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고교 동창과 함께 김씨를 1차례 만났을 뿐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변 전국장은 후배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사건 당시 일정이 담긴 개인휴대단말기(PDA) 파일을 복원하고, 국회 영상자료를 챙겨 김씨를 만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어렵게 입증했다. 이 덕분에 김씨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그는 무엇보다 운이 좋았던 것같다. 일찌감치 PDA를 활용한 '얼리어답터'(early adopter)가 아니었고, 꼼꼼한 메모광도 아니었고, 유능한 후배조차 두지 않았다면 법원의 결정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이 김씨 진술의 신빙성을 피고인별로 다르게 본 것도 변 전국장의 '운'을 부각시킨다.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 등에 대한 김씨의 진술에 대해서는 '그의 전력과 학력, 교인 신분 등을 감안할 때 거짓말로 보이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단한 반면 변 전국장에 대한 것은 사실상 '거짓말'로 간주했다.
더구나 문제의 '보신계명'은 이번 판결 전까지 "일정을 빼곡히 메모해 두면 오히려 불리해진다"는 반론에 판정패한 상태였다.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까지 모두 드러나 자칫 지인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 판결문에는 변 전국장의 대학 동기나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이 모두 검찰 조사를 받았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뇌물사건의 판결문에 거명됐다는 사실을 알면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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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관가에서는 알리바이 입증 여부가 유·무죄를 가른 것을 놓고 의아하다는 반응이 적잖다. 한 공무원은 "알리바이를 입증하면 무죄고, 그렇지 못하면 유죄라고요? 그렇다면 피고인 스스로 돈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지 못하면 죄가 없어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얘깁니까"라고 반문했다. 물증이 없는 뇌물사건의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라 하더라도 영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변 전국장의 승리는 완결형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수사나 사법처리를 보다 신중히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운'이 따르지 않거나, 뒤늦게 결백이 확인됐으나 이전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사례가 종종 목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증거가 없다면 유죄의 의심이 가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대법원의 판례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