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같은 음악, 밴드는 내 생과 함께 할 평생 직업

운명같은 음악, 밴드는 내 생과 함께 할 평생 직업

이정흔 기자
2008.04.28 08:37

[머니위크]은퇴, 그 후의 삶..강남실버밴드 배정우 단장

"은퇴라니? 나한테 죽을 때까지 은퇴라는 건 없어."

은퇴 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질문을 건네자마자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이었다. 오히려 질문한 쪽을 머쓱하게 만드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야 어렴풋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배정우(79) 강남실버밴드 단장에게 밴드활동은 단순한 은퇴 후 소일거리가 아니었다. 프로 뮤지션으로서 관객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직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음악과 함께한 젊은 시절

매주 월요일 낮 12시30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상설 무대. 이 시간이면 늘 열정적인 라틴음악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곤 한다. 애절한 사랑이 가슴을 울리는 라 팔로마에서부터 흥겨운 리듬이 보는 이들의 어깨까지 들썩거리게 만드는 맘보 넘버5까지 레퍼토리만 해도 1000여곡이 훌쩍 넘을 만큼 다양하다. 아마추어밴드로 보기에는 매끄럽게 곡을 소화하는 연주실력이 수준급이다.

그런데 붉은색 나비넥타이를 근사하게 둘러 맨 연주자들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60세에서 80세까지의 할아버지 연주자들로 구성된 '강남실버밴드'. 밴드의 이름만 보아서는 그저 은퇴한 할아버지들이 취미 삼아 활동하는 밴드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왕년에 음악 꽤나 했던 베테랑 뮤지션들이다. 멤버의 대다수가 KBS관현악단 등 각종 무대에서 오랫동안 연주를 해 온 전문 음악인들로 구성된 밴드인 것이다.

이 밴드를 이끌고 있는 배 단장의 음악 인생 역시 다른 멤버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배인성. 젊은 시절 그가 음악 활동을 할 때 썼던 예명이다. 기타 연주자 길옥윤, 아코디언 노명석, 트럼본 송민영 등 1950년대 한국 경음악을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음악인들. 그들이 젊은 시절 몸담았던 밴드로 너무도 유명한 엄토미악단의 최연소 드러머 배인성이 바로 지금 강남실버밴드의 배 단장이다.

"18세 쯤이었을거야. 엄토미악단의 막내로 처음 밴드생활을 시작했는데 음악하는 게 너무 좋더라고. 내가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가 1947년 쯤이니까 한국전쟁을 거치기도 했고 시절이 많이 어수선했었지. 그때 우리가 미8군 무대, 방송국 악단, 나이트 클럽 무대까지 안 다니는 데가 없이 다 다니면서 연주를 했었어.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해."

그는 특히 부산 해운대 극동호텔에서 연주를 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는 1966년 극동호텔의 개관식을 시작으로 약 3년 동안 극동호텔 전속 악단장으로 근무했다. "그 당시 극동호텔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호텔이거든. 개관식 때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석하고 당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죄다 참석했는데 그때 그 오픈무대에서 연주를 한 게 아직도 가장 많이 기억에 남아. 극동호텔에서 연주를 했던 그 시절이 나한테는 가장 재미있었고 즐거웠던 것 같아."

◆호텔리어에서 드러머로 돌아오다

그러나 계속 밴드생활을 하기에는 다소 불안정한 수입이 마음에 걸렸다.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자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매달린 채 집안살림을 나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배 단장은 밴드생활을 모두 접고 전직을 하기로 결심한다.

1969년 그는 오랫동안 연주생활을 했던 극동호텔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호텔리어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는 호텔리어 생활이 불만족스럽진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그는 호텔의 지배인에서부터 시작해 전무를 거쳐 동아그룹이 운영했던 속초 설악파크호텔의 사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호텔리어로서 능력도 인정받았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한 카지노호텔에 스카우트되어 1989년 은퇴를 맞기 전까지 미국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솔직한 말로 나는 지금도 가끔 음악하는 후배들을 보면 음악 말고 딴 일 하라는 얘기를 하곤 해. 사실 음악만 해서 먹고 살기엔 힘들잖아. 나부터도 음악을 하는 게 너무 좋아 딴따라 소리 듣고 집에서 쫓겨나면서까지 밴드생활을 계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호텔리어하면서 자가용도 타고 다니고 집도 살 수 있다는 게 좋더라고.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음악 대신 호텔리어를 선택한 게 잘한 일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그는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밴드들을 볼 때마다 "내가 바로 저 무대에서 저렇게 연주를 했었는데"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늘 가슴 속에 품고 살았던 배 단장은 은퇴 후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노명석, 엄토미 등 옛 음악 동지들을 규합해 '청송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늘 푸르게 살자'는 뜻을 지닌 청송회는 말하자면 예전의 동지들이 한데 모여 아직도 식지 않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풀어놓고자 만들어진 원로밴드였던 셈이다.

그러던 것이 1998년부터 강남구청이 이 원로 음악인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면서 본격적인 '강남실버밴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배 단장은 열정적으로 연주 연습에 매달렸다. 수시로 오디션을 통해 실력있는 연주자를 스카우트하기도 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며 익힌 기술을 다른 단원들에게 손수 가르쳐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라틴음악이나 재즈 곡 등을 직접 편곡해 단원들의 연주를 지휘하기도 한다.

"이왕 연주를 할거면 다른 밴드에서 안하는 걸 해야지. 그런데 라틴음악은 손쉽게 연주하는 밴드가 잘 없더라고. 그래서 이거다 싶은 마음에 주로 라틴음악들을 선곡해서 연습을 시작했어. 라틴음악 리듬은 보통 국내에서 즐겨듣는 음악들이랑은 좀 달라. 그래서 연주하기가 쉬운 곡들은 아닌데도 우리 단원들은 워낙에 음악을 하던 사람들이라 무리없이 소화하더라고."

강남실버밴드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습한 곡들로 월요일마다 정기공연을 갖는다. 처음에는 강남구청 로비에서 시작했던 공연이 지금은 입소문을 타면서 코엑스 상설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할아버지들의 열정적인 연주에 열광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강남구청 정기공연 외에도 노인잔치나 어버이날 체육행사 등 한달에 10여차례가 넘는 공연을 선보이는 인기밴드가 됐다.

◆죽는 그날까지 음악 연주가 꿈

"음악 연주하는 데 나이가 따로 있나. 열정만 있으면 되지. 오히려 젊은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연습하니까 열정 하나만큼은 아무도 우리를 따를 자가 없을 걸. 밴드 단원들이 모두 워낙에 음악을 재밌어 하고 즐기면서 연주하니까 모두들 우리 음악을 좋아해 주는 것 같아."

하루 연습시간 3시간. 어르신들이 그 오랜시간 동안 끊임없이 악기를 연주하고 몸을 흔들려면 기진맥진 할 것만 같은데 배 단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 시간이면 연주가 어렵기로 유명한 라틴음악 대여섯곡을 소화하고도 남는다며 자신만만이다. 음악이 있으니까 연습시간이 항상 즐겁고 즐거운 만큼 힘든 것도 씻은 듯이 사라진다는 것이 배 단장의 설명이다.

"날 보면 보통은 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고 말을 해. 내가 80살이라고 그러면 모두들 안 믿어. 근데 그게 다 음악 때문인 거 같아. 내 인생 모토가 '즐겁게 살자'거든. 음악을 하는 것만큼 내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어. 항상 즐거우니까 나도 젊게 살 수 있는거지.하하하."

배 단장은 아직도 무대에 서서 음악을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음악에 미친 사람'마냥 열정을 품은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그 순간이 어느 때 보다 행복하고 그 행복한 순간을 매일매일 누리며 사는 데 늙을 틈이 어디 있냐는 것이 배 단장의 주장이다.

"나는 원래 낙천적인 성격인데 그게 아마 음악이랑 가까이 살아서 그런 것 같아. 음악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거니까 그것만큼 좋은 건강비결이 어디 있겠어. 그래서 나는 무대 위에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즐겁게 살거야. 그게 지금 내 인생에 대한 유일한 바람이야."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그의 모습이 부러워진다. 음악과 함께 누구보다 젊은 인생을 살고 있는 배 단장. "지금부터 8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으로서 건강하게 활동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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