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토론회. 박빙의 접전 탓인지 공화당 조지 W 부시와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 대한 입장은 같았다. 부시 후보는 "그린스펀 의장을 만나 정책 방향을 잡겠다"고 말했고, 고어 후보는 "그가 있어 95년 멕시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치켜세웠다.
그린스펀 의장이 양 진영에서 러브콜을 받은 것은 시장의 지지 덕분이었고, 여기에는 신중한 메시지로 신뢰를 쌓아온 게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다.
올들어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금융감독 당국은 그린스펀의 교훈을 새겨야할 것같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취임 초 외환은행 매각 지연에 따른 국제 신인도 하락 가능성을 우려하며 "빠른 시일 내에 풀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 5일에는 쇠고기 파동에 따른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금융위의 단골 용어인 '법적 불확실성'도 다시 꺼내들었다.
급기야 지난 20일에는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 2심 판결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외환은행 헐값매각 재판은 아직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분명한 신호를 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초기와 180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HSBC의 외환은행 인수를 용인할 수 있다"는 취지로 해석된 초기 발언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했다.
전 위원장은 올 3월19일 열린 한 조찬강연에서 "금융위 간부들과 저녁식사를 시작하면서 '다들 옷 벗으시죠'라고 했더니 모두 안색이 변하더라. 공무원이 되니 정말 말조심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린스펀 의장은 반응(response)은 하더라도 대답(answer)은 하지 말라고 했다"며 신중한 메시지를 예고하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 국제 금융시장에서 지명도가 높은 전 위원장이 당시 초심을 버리지 않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