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note]본업은 통화량 조절...나라 살림은 정부의 몫
이 기사는 02월03일(11:21) 머니투데이가 만든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어느 나라 중앙은행 총재가 지금은 전 세계 경제가 어렵고 금융이 위험에 처했으니까 사람들이 중앙은행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30일 한국은행 이성태 총재가 서울이코노미스트클럽 연설 중 한 말이다. 다른 나라 총재의 입을 빌려 우회적으로 속내를 털어놨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금융위기 소방수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은 비슷한 처지다. 정상적인 경제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중앙은행들이 하고 있다. 도를 넘어선 역할을 정부와 시장이 요구하기도 한다.
이날 연설의 3분의 2 가량이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졌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은 결제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하는 기구로 출발해, 본원통화의 양과 가격을 정하는 역할을 한다"며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이 총재는 왜 경제 전문가라 인정받는 이코노미스트와 기업 CEO들을 앞에 두고 중앙은행의 설립 취지며 목적 등을 강조했을까.
한국은행은 지난해 9월 이후 22조원에 달하는 원화를 시중에 풀었다. 당초 공급을 계획했던 22조7000억원 대부분을 집행한 셈이다.
하지만 자금경색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은행 등 금융중개기관이 중개기능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은행은 자금을 조달해 기업이나 가계 등에 빌려줘 얻는 차익으로 운영된다. 현재 은행들은 정부의 유동성 공급으로 주머니가 넉넉해졌지만 돈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실정이다. 한은이 지난 7일 발표한 대출태도지수에 따르면 국내은행들의 기업대출태도는 지난해 3분기 이후 강화됐고, 강도도 세졌다.
은행들은 보유한 유동성을 낮은 금리라도 다시 한은에 맡기고 싶어 하고 있다. 지난달 9일 환매조건부채권(RP)매각 정례입찰엔 80조원이 몰렸다. 기업에 대출해주거나 회사채에 투자하느니 2.5% 금리만 받더라도 한은에 돈을 묻어두자는 속셈이다. 한은으로서는 쓰라고 준 돈이 자꾸만 되돌아오니 답답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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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생각처럼 움직이질 않자 화살은 다시 한은에게로 오는 상황. 시장에서는 한은의 기업어음(CP) 직매입 등의 요구를 하고 있다. 한은이 더 '센'조치를 취해주길 바라는 것은 정부도 마찬가지다.
연설 전날인 29일 이 총재는 청와대에서 열린 4차 비상경제대책회의(워룸 회의)에 참석했다. 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워룸에서 또 한 소리 들은 것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지난 1차 회의 때 이명박 대통령은 이 총재에게 재경부와의 불협화음은 안 된다고 훈시했다.
이 총재는 연설 중 "중앙은행은 금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게 임무지 나라 경제를 살리는 게 역할은 아니다"며 "망해가는 경제를 위한 살림은 정부의 몫이다"고 강조했다. 정해진 법 안에서 해야 할 일의 구획을 명확히 나누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 중앙은행에 더 이상을 요구하지 말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자는 유가의 ‘정명사상’같은 이야기로 이날 연설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 총재가 생각하는 ‘각자의 역할’에 정부와 금융기관도 동의할지, 나아가 충실히 이를 이행해 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