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위크]칼럼
외환위기 직후 갑자기 몸값이 뛴 뱅커들이 있다. 외국계 은행 출신들이었다. 특히 씨티은행 소속들이 각광을 받았다. 첨단 금융기법을 배우겠다던 국내 금융회사들은 이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그 후 이들은 제 역할을 했을까? 금융계 전반의 평가는 실패 쪽에 기울어 있다. “이들이 국내 은행에 와서 전수한 첨단 기법이라는 것은 모든 사안에 대해 노(no)라고 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을 스카우트했던 한 시중은행 한 임원의 말이다. 결국 이들 상당수는 옮겨간 은행에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했다.
금융업계에서 이들을 ‘씨뱅이’이라는 부른 것도 실패를 반증한다. 이 별명은 씨티뱅크 출신이라는 뜻이지만 다분히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다. 더욱이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시티뱅크는 위기에 빠졌다. 미 정부의 구제금융 이후 대부분 금융회사의 회복세가 완연하지만 시티만은 예외다. 여전히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은행 100년의 역사를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정평이 난 <뱅커스>(The Bankers)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저명한 미국 금융산업 전문 저널리스트인 마틴 메이어. 그는 은행업이 예금을 모아 대출을 하는 당초의 모델에서 스스로 유동성을 만들고 나누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전통적 은행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모델이 가진 위험성도 지적했다. “상업은행은 자본시장에 진출했지만 시장의 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은행의 본질적 경쟁력은 단순히 첨단기법이나 덩치가 아니라 결국 신뢰의 문화다. 저자가 은행의 역사를 통해 하고자 한 말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 은행산업 초기의 인상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하고 있다. “시카고 노던트러스트은행의 솔로몬 스미스는 날씨와 관계없이 항상 우산을 가지고 출퇴근했다. 이 지역 노년 여성들은 그가 화창한 날에도 우산을 든 채 기차역으로 걸어가는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런 사람이 일하는 은행이라면 안심하고 맡겨도 괜찮겠는 걸.’”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은행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본질적 경쟁력인 신뢰를 높이기보다는 엉뚱한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 첨단금융기법에, 이번에는 몸집 불리기에만 매달리고 있다. 우리 정부나 금융감독당국마저 현혹당하고 있다. 첨단기법이나 덩치야말로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여기고 있어서다. 은행 대형화나 첨단화라는 도그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이러다가는 위기 시에는 정부나 국민의 지원에 의존하고 평상시에는 양적 팽창에만 몰두하는 은행의 성장 방정식이 생겨날 판이다. 더욱이 지난해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정부에 외환 유동성을 지원해달라고 했던 것이 우리 은행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몸집 불리기 경쟁의 방식도 납득하기 어렵다. 무조건 시장점유율을 늘려 경쟁자들을 압도하겠다는 식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장기적으로 금융시장에서의 경쟁을 제한하려는 전략이다. 당장 매물로 나온 외환은행을 두고 벌이는 경쟁만 해도 그렇다. 지난 2006년 외환은행 인수에 실패했던 국민은행은 이번에도 이 은행 인수에 올인하는 양상이다. 경영진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인수를 기정사실화하는 발언을 할 정도다. 이 발언으로 거래처를 옮기는 실질적 피해가 발생하면 소송을 당할 수도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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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문제를 차지하더라도 리딩뱅크로서의 처신으로도 문제가 있다. 무조건 덩치만 키우겠다고 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본질적 경쟁력 면에서 어떻게 세계적인 수준이 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