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위크 커버스토리]상권 대변혁/ 행단보도 쇼크
지난해 말 도시고속철도공사 홈페이지에는 특별한 감사의 글이 올라왔다. 이수역 근처에 사는 2살과 4살짜리 아이를 둔 주부 백모씨의 글이었다.
주부는 매번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을 오르는 일이 벅찼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는 자신의 집과는 반대 방향에 있어 이용할 수 없었다. 매번 역무원에게 부탁해 유모차를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처지였다.
이수역사는 구조가 복잡하고 이중 계단으로 설계돼 있어 휠체어 리프트 설치가 어려웠다. 동선 설계가 잘못돼 있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630m 정도를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한 문제를 파악한 역장과 역 직원은 구청과 시의회에 도움을 청해 횡단보도 설치를 적극 요청했고 결국 지난해 11월 이수역 사거리의 횡단보도 설치를 이끌어냈다. 백씨는 “역장이 횡단보도 설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편리하게 역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계단의 공포. 주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에게서 자주 흘러나오는 말이지만 비장애인에게도 생소하지만은 않다. 지하철이나 지하보도의 까마득한 계단을 오를 상황이 오면 우선 한숨부터 내쉬는 사람도 적잖 않다. 오죽했으면 관절통 치료제 CF 광고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담았을까.
지난 2008년 서울시는 ‘걷기 좋은 도시’를 조성하겠다며 2012년까지 서울 도심 일대를 비롯해 시내 주요 교차로 111곳에 횡단보도를 신설하거나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횡단보도 설치는 지자체와 경찰청의 협조로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5월8일 서울시가 보행자 우선도시 조성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시는 연구용역을 통해 이면도로 실태를 조사하고 보행자 우선도시 시범지역을 선정해 이르면 10월쯤에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집을 나설 때 가장 먼저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바로 보행자의 다리지 않느냐”면서 “과거에는 자동차 운행을 도시계획의 1순위로 뒀다면 이제는 보행자를 도시 교통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보행자 및 교통약자에 대한 시설물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단의 공포’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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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보도로 다니기 귀찮아 건물 후문 쪽 음식점을 이용하곤 했는데 횡단보도가 생긴 다음부터는 건너편 먹자골목도 종종 찾아 가요. 요즘엔 날씨도 좋은데다 지상으로 다닐 수 있어서인지 길 건너 식사하러 다니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아요”
강남파이낸스센터에서 근무하는 박지선(28) 씨의 이야기다. 지난 4월 강남 테헤란로 역삼역 4거리는 작은 변화를 맞았다. 그동안 없던 횡단보도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은행 강남지점에서 강남파이낸스빌딩 쪽이나 GS강남타워 쪽으로 테헤란로나 논현로를 건너려면 지하차도를 이용하거나 한참을 돌아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했다.
주변에서 편하게 왕래할 수 있는 곳은 역삼역 4거리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강남 일대는 횡단보도 천국으로 바뀌었다. 삼성역을 비롯해 선릉역, 대모산역, 수서역, 압구정역, 포스코 4거리, 르네상스 교차로 등이 횡단보도 설치를 끝냈다.
‘계단의 공포’를 느끼는 장애인과 노약자를 비롯한 교통 약자들은 이 같은 변화를 반긴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많이 확충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통로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지하보도 통행은 꺼리게 마련이다. 지하철 계단을 이용하다가 횡단보도가 설치되면 백씨의 경우처럼 ‘만세’를 외치는 보행자가 상당수다.
반면 상인들은 횡단보도가 새로 생기거나 바뀌게 되면 희비가 엇갈린다. 횡단보도가 생기면 유동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곳과 줄어드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호재를 맞는 쪽은 지상의 상가들이다. 고가차로가 철거되면서 없던 횡단보도가 생긴 회현동 지상에 위치한 상인들은 유동인구가 늘었다며 환영 일색이다. 신세계백화점도 철거 이후 매출이 10% 이상 늘었다.
박대원 상가정보연수소장은 “숙명여대 앞으로 건널목이 새로 생겨 유동인구의 동선이 바뀌자 인근 상인이 상가 이전을 문의한 적이 있다”면서 “상권에서 유동인구의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과거 고대 정문의 지하보도를 폐쇄하고 횡단보도를 설치하자 막걸리 골목 등 고대 앞 상권의 매출이 급증한 것도 같은 이유다.
건널목 쇼크에 떠는 이는?
서울시청광장 새서울지하상가. 한 골동품 매장은 불이 꺼진 채 비상 연락처만 붙어있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영업을 하는 곳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 2004년 지하상가 출입구 앞으로 횡단보도가 들어서자 지하상권이 매몰돼 버린 것이다.
이처럼 횡단보도가 생기면 가장 울상을 짓는 곳은 지하상가다. 지상으로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지하의 유동인구가 뜸해지기 때문이다. 2006년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매출이 줄어든 영등포지하상가도 이런 경우다.

회현동 일대는 몇년 전부터 홍역을 치렀다. 공사를 진행하려는 중구청과 상인들간의 실랑이가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지자체의 횡단보도 설치가 지하상권을 죽인다며 상인들이 강력 반대에 나선 것이 이유였다.
결국 구청은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명동-남산 방면의 횡단보도 등 3개소만 설치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걷기 좋은 도시’의 일환으로 야심 차게 준비했던 서울시가 주요 개선 지역으로 꼽았던 명동, 을지로, 종로, 회현 가운데 회현은 반쪽짜리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상인들은 더 이상 횡단보도 설치가 이슈화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눈치다. 전국지하도상가상인연합회 관계자는 “횡단보도 설치는 지역별 상황에 따라 다르다. 회현의 횡단보도는 남산타워를 오르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설치된 것)”라며 “더 이상 이슈도 없고 할 말도 없다”며 입을 닫았다.
이들이 횡단보도 설치에 민감한 이유는 생존권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떠나고 싶지만 들어올 때의 권리금이 발목을 잡는다. 지하상가 매장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가게를 내놔도 들어올 사람이 없는 현실이 두렵다.
전문가들은 지하상가 상인들의 생존권과 보행 약자의 보행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에스컬레이터와 설치와 특색 있는 업종전환을 권장하고 있다.
명동입구 횡단보도 설치 공청회에 참석한 한 대학교수는 지하상권을 살릴 수 있는 대체방안으로 에스컬레이터 설치와 휴식공간 마련을 제시했다. 박대원 소장은 “젊은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의류 등 업종구성을 재편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하 네트워크를 통해 지하상가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횡단보도 설치하는데 3억원?
교차로에 새로 횡단보도를 설치하려면 얼마나 비용이 들까? 관련업계 관계자에게 문의해보니 최고 3억원에 이른다. 보행자 신호등의 가격만 대략 1000만~2000만원. 사거리 신호체계와 횡단보도를 설치하는데 평균적으로 4000만~5000만원이 든다. 이 비용은 주로 공사비다. 인건비와 신호등 구입에 드는 비용이 대다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호등 및 횡단보도 교체에는 신경써야 할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다. 만약 교차로의 신호등과 횡단보도의 위치를 바꾸려면 변압기나 전주, 가로수 등 지작물을 이설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이들을 감안하면 사거리 교차로의 신호 및 횡단보도 개설에 최고 3억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에는 2만개 이상의 횡단보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횡단보도 개설에는 자치단체와 경찰청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들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횡단보도 지정을 결정한다. 지난해 구청장의 횡단보도 건너기 퍼포먼스로 이슈가 됐던 강서구청 사거리의 횡단보도 설치도 주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이뤄진 예다.
한편 횡단보도 설치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이 금지조항이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제11조에 따르면 '육교 지하도 및 다른 횡단보도로부터 200미터 이내에 설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예외로 두는 단서조항이 있어 사실상 주민들의 목소리가 큰 쪽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