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일(현지시간)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조달금리 급등을 막기 위해 국채 매입을 재개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비전통적인 조치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은 실망했다.
우선 드라기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ECB) 정책위원회는 중기적인 물가 안정이라는 임무 내에서, 그리고 통화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독립성을 지키면서 뚜렷한 공개시장 조작을 시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정책위원회는 통화정책 전달성을 고치는데 요구되는 정도에 따라 추가적인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행을 고려할 수 있다"며 "수주일 내에 우리는 그러한 정책 조치에 대한 적절한 모형을 설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채 매입과 추가적인 비전통적 조치를 함께 시행할 수 있다고 말했음에도 시장이 실망한 이유는 크게 5가지로 보인다.
◆ECB 국채 매입 전에 먼저 EFSF에 도움 요청하라
첫째, ECB가 국채 매입에 나서기 전에 어려움을 겪는 국가의 정부는 먼저 유로존 구제기금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밝힌 점이다. 유로존 구제기금이란 일시적인 기금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과 항구적인 기금인 유로안정화기구(ESM)를 말한다.
드라기 총재는 "이례적인 금융시장 환경과 금융 안정성에 대한 리스크가 존재할 때 정부는 채권시장에서 EFSF/ESM을 활성화할 준비를 해야 하며 기존 가이드라인에 부합하는 엄격하고 효과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드라기 총재는 질의응답시간에도 "우선 모든 정부는 EFSF에 먼저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며 "ECB는 정부가 재정 측면에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과거 방식처럼 조건 없는 ECB의 국채 매입은 안 된다는 의지로 보인다.
EFSF에 대한 구제금융 요청은 현재 국채수익률 급등으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스페인이 피하고 있는 일이다.
◆스페인, 끝내 EFSF에 국채 매입 요청 의사 안 밝혀
마침 이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회담을 갖고 있던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와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드라기 총재의 노력을 치하하면서도 EFSF에 국채 매입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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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이탈리아의 국채수익률을 낮추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겠다며 그런 결정은 "시기상조"이며 현재로선 "그럴 의도도 없다"고 말했다.
라호이 총리는 3번이나 유럽 구제기금에 국채 매입을 요청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ECB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만 높이 평가하며 답을 피했다.
◆ECB 즉각적인 조치 없어 실망..9월까지 기다려야 할듯
둘째, ECB의 조치가 9월 전에는 나오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날 스페인의 국채수익률은 또 다시 7%를 넘어서는 등 시장 상황은 한시가 급한데 ECB 조치는 정책위원회 승인을 얻어 시행되기까지 몇 주일이 걸린다는 점에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기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ECB의 3개 위원회가 현재 유로존 위기국의 국채수익률을 낮추기 위한 조치를 마무리하고 있으며 얼마 뒤 최종 방안에 대해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은 국채 매입이 어렵다는 것이다.
국채 매입, 이른바 증권시장프로그램(SMP)과 관련, 드라기 총재는 구체적인 내용이 3개 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국채 매입 규모가 "무제한일지 제한적일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국채 매입으로 풀린 통화를 금융시스템의 지급준비금으로 상쇄시켜 불태화할지, 아니면 그대로 통화량이 늘어나도록 내버려둘지도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태화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실상 양적완화(QE)이다.
ECB는 2010년 5월부터 SMP로 2120억유로를 사용했지만 국채를 매입하는데 쓴 돈만큼 시중 자금을 회수하는 불태화를 고수해왔다.
드라기 총재는 또 SMP가 투명하게 이뤄질 것이라며 어떤 국가의 국채를 얼마나 살지 발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전 SMP에서는 전체 국채 매입 규모만 밝히고 국가별로는 공개하지 않았다.
◆독일 반대 명시하며 매입 대상 단기물로 한정
셋째,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국채 매입에 반대해 국채 매입 대상이 단기물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밝힌 점이다.
드라기 총재는 현재 마련 중인 국채 매입 방안과 관련해 단 한 위원만 반대한다며 "분데스방크와 (옌스) 바이트만 총재가 국채 매입 프로그램에 대해 유보적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만기가 더 짧은 국채를 매입하는 것은 정책 전달 기제를 회복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통화정책"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10년물 국채수익률이 이날 급등했다. 스페인 10년물 국채수익률은 44bp 폭등하며 7.13%를 나타내 다시 7%를 넘어섰다. 이탈리아의 10년물 국채수익률도 39bp 폭등하며 6.30%로 올라갔다.
하지만 드라기 총재가 국채수익률 곡선의 단기물 쪽을 끌어내리는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말했음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2년물 국채수익률조차 내려가지 않았다.
◆ESM에 대한 은행 면허 부여, 반대 입장 밝혀
넷째, ESM에 은행 면허를 부여하는 방안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ESM에 대한 은행 면허 부여는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 핵심국가들도 반대하는 사안이다.
드라기 총재는 ESM에 대한 은행 면허 부여와 관련, "ECB의 소관이 아니다"라며 "현재 ESM 구조는 (ECB의) 적절한 거래 당사자로 인식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섯째, 새로운 형태의 SMP를 마련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다른 즉각적인 조치라고 내놓았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ECB는 금리를 유지했고 시장이 기대했던 은행들에 대한 장기 저리 자금 대출, 즉 3차 LTRO도 발표하지 않았다.
◆ECB, 국채 선순위 특혜 포기 시사는 긍정적
다만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드라기 총재가 일부 유로존의 국채 수익률 프라미엄이 "비이성적으로 높다"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계획을 고안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로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유로화에 반대해 베팅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밝힌 점이다.
둘째, "(ECB의) 선순위에 대한 민간 투자자들의 우려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해 민간 투자자들에 대한 ECB의 채권 선순위 조건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ECB가 매입한 국채는 일반 민간 채권자들이 보유한 국채보다 채무 상환 선순위를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ECB는 그리스의 채무재조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 결과 ECB가 국채를 더 많이 매입할수록 민간 채권자들은 향후 채무재조정시 손실 위험 때문에 그 국채를 더 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RBC캐피탈마켓의 유럽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젠스 라센은 투자자들이 ECB의 즉각적인 조치를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했으나 ECB 통화위원회가 효과적인 시장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향후 조치에 대해 상당히 강력한 의지가 표출됐다"며 "동시에 (ECB는) 스페인 정부를 얼마간 압박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