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시간제, 대한민국의 실험-5]양질 시간제로 '경력 단절' 극복

"병원 들어오기 전에는 그냥 잘 나가는 주부였죠. 백화점에서 1년에 몇 천 만원씩 쓰고 종일 밖에서 지내다가 저녁이 돼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아이들도 다 크고 우연한 기회 병원에 오전만 일하는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일 뿐 아니라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요즘엔 부쩍 부드러워지고 사람 됐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듣습니다. 아이들도 정말 좋아해요."
유성선병원 국제검진센터에서 일하는 44세 주부 이종순씨의 하루는 새벽 6시20분에 시작한다. 일어나 씻고 아이들 먹을 밥과 찌개를 준비한 후 집을 나와 병원 셔틀버스에 오른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직접 챙기지 못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지만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아침 8시~오후 1시 근무 시간이 지나면 자유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근무를 끝내고 1시20분경 집으로 가는 셔틀에 오르면 다시 주부로 돌아가요. 중학생인 아들이 2시 좀 넘으면 집에 오는 데 집에 오면 엄마가 있어서 좋다고 하더라고요. 자칫 엇나갈 수 있는 사춘기 나이의 아이들을 계속 돌볼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죠."
이씨는 선병원에서 건강검진 고객 안내 업무를 맡고 있다. 접수를 도와주고 고객들이 잘 모르는 내용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1996년 한 회사의 세무파트에서 근무하다 첫 아이를 임신하며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줄곧 가정주부로만 지냈다.
오랜 공백 기간 후 일을 시작할 때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은 일에 대한 적응이었다. 10년이 넘게 쉬다가 일을 시작하다보니 혹여 제대로 못 따라가거나 무시당할까봐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선병원에서 그런 고민은 잊었다. 이씨는 "오전만 근무한다고 해서 차별을 당하거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오히려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할 정도"라며 웃었다.
유성선병원에는 이씨처럼 오전 근무만 하는 직원이 74명 있다. 고용계약서상 근로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이들은 진료지원부서에서 근무하며 행정 및 사무보조, 수진자 안내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임금과 4대 보험 등에서 전일제 근로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오전 8시에서 오후 1시까지 일할 수 있다. 혹 초과근무를 원하는 사람은 오후 1시~5시까지 몇 주 단위로 근무 일정을 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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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시간은 유동적인데 반해 월급, 복지 등에서 차별이 없다. 가족 중 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위로휴가를 받는 것은 기본. 가족이 아파 병원을 찾으면 할인도 받을 수 있다.
건강검진센터의 특성에 맞게 일자리를 유동적으로 운영하면서 자연히 생긴 자리다. 박희숙 유성선병원 간호부장은 "건강검진의 특성상 오전에는 고객들이 몰리지만 오후에는 줄어든다"며 "유성선병원을 짓고 건강검진센터를 늘리면서 오전에만 근무하는 인력이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국가건강검진 고객이 줄어드는 겨울은 시간제 근무자들에겐 방학이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여행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단 근무의 연장성은 확실히 보장된다.
이규은 선병원 행정원장은 "한달 정도 쉰 후 직업이 없어진다면 불안하겠지만 여기는 유지된다는 것이 차이"라고 말했다. 안정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병원에도 큰 보탬이 됐다. 이 행정원장은 "의료 분야는 고객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할 정도로 숙련도가 중요하다"며 "병원 입장에서 인력이 고정적으로 확보되고 숙련도가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육도 투자인데 투자 인력이 나가면 손해"라며 "무조건 8시간 근무하는 것으로는 인력을 꾸리기 힘들다. 일반기업이나 생산직에서 활용하면 인력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