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폭력을 피해 몸을 숨긴 30대 여성이 이혼소송 서류를 통해 새 주소가 남편에게 노출된 뒤 살해됐다. 스마트워치와 접근금지 명령도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다. 피해자는 차량 내비게이션 기록과 블랙박스 영상까지 삭제하며 흔적을 지웠지만, 정작 소송 서류가 남편에게 피신처를 알려주는 통로가 됐다.
현행 제도상 상대방에게 송달되는 소송 서류에서 주소를 가리려면 피해자가 별도로 신청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소송 접수 단계에서 주소 공개 가능성과 비공개 절차를 명확히 안내하고, 가정폭력 등 위험이 확인된 피해자의 경우 별도 신청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주소를 가리는 등 선제적인 보호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지난 3일 살인과 아동복지법 위반(아동학대)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 A씨에 대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뒤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현직 공무원인 A씨는 지난 1일 오전 7시17분쯤 경기 광주시 한 다세대주택 외부 계단에서 이혼 소송 중이던 아내 B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B씨는 피습 직후 스마트워치로 신고했고 경찰은 3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B씨는 다발성 자상을 입고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현장에 있던 5세 딸도 손가락을 다쳤다.
A씨는 이혼 소장을 통해 B씨의 새 주소를 파악한 뒤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범행 직후 달아난 A씨는 4시간여 만에 수원시 장안구 한 모텔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지난달 11일 이혼 소장을 받은 뒤 위자료와 재산분할, 양육권·양육비 등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해 범행을 결심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A씨가 약 3주에 걸쳐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고 있다.

B씨는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총 네 차례 경찰에 가정폭력 피해를 신고하거나 상담을 요청했다.
처음 두 차례는 B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세 번째 신고가 접수된 지난 4월에는 A씨가 흉기로 B씨를 협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지난 5월 네 번째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을 폭행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현행범 체포됐다.
경찰은 B씨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A등급' 재범 우려 피해자로 지정해 관리했다. 임시숙소도 권했으나 B씨는 직장과 딸의 어린이집 거리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B씨는 수원에서 경기 광주의 친척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독자들의 PICK!
지난달에는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법원으로부터 주거지 격리와 100m 이내 접근금지,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 등 임시 보호명령도 받았다.
유족에 따르면 B씨는 새 주소를 숨기기 위해 차량 내비게이션 기록과 블랙박스 영상까지 삭제했다. 하지만 이혼소송 서류가 A씨에게 송달되는 과정에서 주소가 노출됐다. B씨는 지난달 경찰에 "주소 비공개를 신청하지 않아 남편에게 알려진 것 같다"고 불안감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의 신병을 확보할 기회가 앞서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은 지난 6월 A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공무집행방해 혐의만 영장에 적시했다. B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수협박 등 가정폭력 혐의는 영장 범죄사실에서 제외했고, 영장은 검찰 단계에서 반려됐다.
특수협박은 피해자의 처벌 의사와 관계없이 수사할 수 있고 공무집행방해보다 법정형이 무겁다. 경찰이 이를 구속영장에 포함했다면 A씨의 신병을 확보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소송 절차에서는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당사자가 법원에 개인정보 보호조치를 신청해 주소 등을 상대방에게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피해자가 직접 신청해야 제도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이나 스토킹 피해자가 비공개 신청 절차를 알지 못해 피신처가 노출되는 일을 막으려면 소송 접수 단계부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웅제 법률사무소 희담 대표변호사는 "비공개 신청 절차를 모르는 피해자가 대다수"라며 "가정폭력방지법상 피해자의 신변 노출을 막는 것은 국가 책무인데, 이를 피해자 요청에 의존하는 건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송 접수 단계에서 현주소가 상대방에게 송달되는 서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주소 공개를 원하는 경우에만 기재하도록 해야 한다"며 "가정폭력과 스토킹 사건의 경우 대체 주소를 기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박광남 법률사무소 도헌 대표변호사도 "접수 단계에서 법원이 주소 공개 가능성과 비공개 신청 방법을 의무적으로 안내해야 한다"며 "주소 공개는 명시적으로 원하는 경우에만 허용하는 선택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가정폭력이나 스토킹 등 위험이 이미 확인된 경우에는 피해자의 별도 신청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주소를 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현재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명령 사건에서는 피해자 안전에 위협이 될 우려가 있는 경우 주소 등을 가리고 서류를 송달할 수 있도록 하는 보호 규정이 있다.
전 변호사는 "위험이 확인된 사건에서 주소는 '신청하면 가려주는 정보'가 아니라 '필요성을 소명한 경우에만 공개되는 정보'여야 한다"며 "피해자 보호명령 사건은 국가기관이 가정폭력과 재발 위험을 심사해 인정한 것이므로 피해자에게 다시 '주소 비공개를 신청하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임시 조치나 보호명령 이력이 가사 재판부에 자동 전달되도록 전산 시스템을 연계해 이혼 소송에서도 법원이 직권으로 주소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B씨가 스마트워치로 신고하고 경찰이 3분 만에 출동했음에도 범행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현행 신변보호 조치의 한계도 드러났다. 스마트워치는 피해자가 위험을 인지한 뒤 직접 신고해야 경찰이 출동하는 방식인 만큼 가해자의 접근 자체를 막는 예방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