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연꽃·소리에 취하니 술이 필요가 없구나

달빛·연꽃·소리에 취하니 술이 필요가 없구나

김유진 기자
2015.08.31 07:20

[르포] '창덕궁 달빛기행' 체험해보니…고요함 속에 감각 일깨우는 고궁의 풍경

'창덕궁 달빛기행'이 진행 중인 인정전의 모습. /사진제공=한국문화재재단
'창덕궁 달빛기행'이 진행 중인 인정전의 모습. /사진제공=한국문화재재단

해가 넘어가고 궁궐 담장 처마 끝에 달이 내걸리는 오후 8시. 시민 100명이 창덕궁 정문 돈화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안내데스크에서 받은 무선 통신기기를 목에 걸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뿌-" 고동 나발을 부는 소리와 함께 돈화문이 활짝 열렸다.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오늘 왕실가족의 안내를 맡은 궁녀입니다. 제 안내를 따라 오늘 하루 왕이, 왕비가 되어 창덕궁 후원을 걸어보십시오."

지난 27일, 하반기 '창덕궁 달빛기행'이 시작됐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살아 숨 쉬는 궁궐 만들기'의 하나로 만든 궁궐 체험 프로그램이다. 오는 10월까지 매월 보름달이 뜨는 3일간 2시간씩 저녁에 진행한다. 인정전, 낙선재 후원 등을 거닐고 소리와 국악연주도 보고 들을 수 있다.

매년 행사 시작 전에 날짜를 정해 표 판매가 진행된다. 올해 하반기 예매는 지난 11일 온라인으로 진행됐으며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표가 동났다. 1인 3만 원이라는 고가에도 입소문이 나 경쟁이 치열했다.

◇ 시각을 열고 후각을 진하게…풍경의 새로운 발견

깊은 어둠 속에서 체험자들은 4명당 하나씩 주어지는 청사초롱 빛을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대부분 연인, 가족끼리 왔지만 대화는 없다. 다들 안내자의 음성에 따라 고요히 고궁을 걸으며 풍경을 눈 속에 넣을 뿐이다.

자박자박, 흙길을 걷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함. 청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은 더욱 예민해졌다. 촛불 색 희미한 조명을 꼭 필요한 곳에만 설치해 두었지만 문살 문양과 처마 끝 곡선의 모습은 환한 낮의 것보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창덕궁 전역에서 자라는 나무와 연꽃이 내뿜는 풀냄새가 진하다.

'창덕궁 달빛기행'이 진행되는 창덕궁 비원의 모습. /사진제공=한국문화재재단
'창덕궁 달빛기행'이 진행되는 창덕궁 비원의 모습. /사진제공=한국문화재재단

"이곳은 낮에 창덕궁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오직 달빛기행에 오신 여러분만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이에요." 낙선재 뒤뜰이다. 안내자는 큰 비밀을 공개하기라도 하듯 체험자를 안내한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 잔디밭 위에 두 발을 딛자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남산타워를 비롯해 높은 현대식 건물들만 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부 기와집이거나 초가집이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 뼘 더 가까워진 보름달을 보며 소원성취를 비는 시간. 참가자들은 저마다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꼭 감았다.

◇ 두개의 달, 그리고 거문고 소리…이곳이 '무릉도원'인가

보름달 모양을 따서 만든 원형의 석조 출입구를 지나니 큰 연못이 펼쳐진 창덕궁 비원이 나왔다.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어둠 속에 흐드러지게 핀 연꽃 사이로 거문고 가락이 울려 퍼진다. '연꽃이 펼쳐진다'는 의미인 부용정(亭)의 그림자도 마치 연꽃처럼 연못 위에 펼쳐졌다.

하늘에 뜬 달 하나, 연못에 뜬 달 하나. 두 개의 달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경험은 환상적이다. 거문고 소리, 연꽃 향기, 달빛에 취해버리니 술이 무용지물이 될 것 같은 공간. 사람들이 비원 곳곳을 취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달빛기행의 마지막은 창덕궁 달빛기행 내내 닫아둔 청각을 열게 하는 국악 공연이 장식했다. 비원을 지나 연경당에 마련된 공연장에 자리를 잡으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거문고와 아쟁, 장구 등을 들고 나왔다.

즉흥적인 가락을 많이 섞어 연주하는 우리 음악 '시나위', 춘향이와 이몽룡의 판소리 '사랑가', 서울시립관현악단 소속 국악인의 아쟁 연주 등이 이어졌다. 영화 '킬 빌'의 삽입곡인 '외로운 양치기'를 비롯해 익숙한 외국 음악을 우리 악기로 재해석한 연주도 이색적이었다.

관람객의 걸음은 아직 왕과 왕비의 그것인데 옥잠화 향이 짙게 나는 출구 방향 뒷길이 아쉬운 듯 여운을 남긴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 한양 궁궐에 다녀온 참가자들은 서울에 다시 발을 디뎠다. 창덕궁의 달빛은 여전히 휘영청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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