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중국식 사회주의 창시자 '덩샤오핑' 서거

'나의 각막은 기증하고 유체는 의학연구에 사용되도록 해부하며 골회는 남기지 말고 대해에 뿌려달라'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정치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남긴 유언이다. 19년 전 오늘(2월19일) 사망한 그의 뜻에 따라 유족들은 그의 골회를 꽃잎과 함께 홍콩 앞바다에 뿌렸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흑묘백묘론)'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과학기술은 제일의 생산력이다' 등 다양한 이론과 실사구시에 기반을 둔 전략을 만들어 중국의 개혁·개방을 총설계하고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그의 과감한 개혁조치로 중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사망 당시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중국인민들의 오늘날과 같은 문명화된 신생활과 사회주의 현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1904년 8월22일 청나라 쓰촨성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1920년부터 1924년까지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1933년 공산당 대장정에 합류해 팔로군 정치위원으로서 장강 도하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건국 후 그는 1952년 정무원 부총리를 시작으로 당요직을 거친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당 안의 비주류였던 시절 그를 지지했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절대 권력자가 된 이후엔 늘 그의 반대편에 섰다. 특히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해 최고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으면서 세 차례나 실각됐지만 그때마다 복직했다. 이 때문에 그에겐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를 되풀이한다는 뜻의 '부도옹'(不倒翁·오뚝이)이란 별명이 붙게 된다.
1977년 세 번째 복권 이후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을 맡으며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한다. 1989년 6월 톈안먼사태 유혈 진압으로 지위가 잠시 흔들렸지만, 1992년 중국 남부를 돌며 개혁·개방 정책의 중요성을 설파한 '남순강화(南巡講話)'로 재차 입지를 굳히고 후계체제도 다진다.
다만 덩샤오핑의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라'는 선부론(先富論)과 연안지역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극심한 빈부격차와 동서 불균형을 가져왔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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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혁에만 매진해 정치체제 개혁과 민주화 실패로 관료부패를 조장했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톈안먼 사태는 발포명령권자였던 덩샤오핑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역사적 평가가 유보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