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년간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던 시리즈가 있다. 이보다 더 오랜 기간 사귀며 애증을 주고받던 작품들도 있지만, 유독 이 시리즈는 꽤 오랫동안 남을 듯 하다. ‘블랙리스트’라는 시리즈다. 2013년 처음 선보였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제임스 스페이더가 주연이라고 했기에 그렇다.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벗겨진 헤어 스타일에 부풀어 오른 체형. 지금으로부터 약 32년 전의 그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서의 제임스 스페이더 이미지 말이다.
숱한 세월 간 어찌 인간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블랙리스트’의 제임스 스페이더는 리즈 시절과 단호한 이별을 했지만, 다른 이미지로 돌아왔다. 이 시리즈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가 '블랙리스트'에서 맡은 레이먼드 레딩턴 캐릭터는 지적인 위트를 구사하고, 인문학적 사유로 통찰하며, 냉소적 잔혹을 선보인다. 근래 몇 년간 본 캐릭터 중에 이처럼 매력적인 인물이 있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과거의 섹시했던 이미지는 온데 간데 없어졌지만, 제임스 스페이더가 레이먼드 레딩턴으로 살았던 시절만큼은 과거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매력덩어리였다.
‘블랙리스트’는 세계 일순위 범죄자 리스트에 등극한 레이먼드 레딩턴이 FBI에 자발적으로 찾아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구속이 아닌 면책권을 요구하고, 대신 FBI에 가장 악질적인 범죄자 리스트인 ‘블랙리스트’를 순차적으로 넘겨주겠다고 한다. 대신 특정 인물을 수사 전담반에 가담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 인물이 메간 분이 연기하는 엘리자베스 킨이다. 시리즈는 범죄자를 잡아나가는 큰 줄기를 유지한 채 레이먼드 레딩턴과 엘리자베스 킨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하나씩 풀어낸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범죄 장르 미드의 관습을 유지하면서 냉전시대의 스파이물이 가진 클리셰를 끌어들인다.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한 겹씩 벗겨내면서 클리셰는 보편성을 벗어나 이 시리즈만의 독특함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게 ‘블랙리스트’는 8년의 세월 동안 8개의 시즌을 이어왔다. 레딩턴 주변, 킨 주변의 인물들도 변함이 없었고, 그 둘 간의 비밀은 풀릴 듯 풀리지 않으며 그 긴 세월을 이어온 것이다. 시리즈가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사의 구조다. 즉, 스토리텔링이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의 면면을 살펴볼 때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바로 존 보큰캠프라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겸 프로듀서다. 그가 우리들에게 시나리오로 유명세를 떨친 작품은 에단 호크와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았던 ‘테이킹 라이브즈’(2004)다. ‘블랙리스트’가 범죄, 스릴러, 스파이 등의 다소 어두운 이야기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펼쳐낼 수 있었을까에 의문이 들었다면 존 보큰캠프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시즌을 거듭하는 동안 캐릭터들이 꽤 많이 바뀔 법도 하건만 ‘블랙리스트’는 거의 동일한 배우들로 굉장히 잘 이끌어왔다. 그 만큼 모든 출연자들이 이 시리즈에 애정을 가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더욱이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었던 2020년의 시즌 7은 ‘블랙리스트’에게도 꽤 힘든 시기였다. 시즌 피날레 에피소드가 한 참 동안 업데이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제작진은 애니메이션으로 마지막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8년간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시즌이 선보인다고 했다. 사실 이대로 안녕일 줄만 알았다. 왜냐하면 시즌 8의 마지막인 22번째 에피소드의 타이틀 자체가 ‘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마지막에서 레이먼드 레딩턴과 엘리자베스 킨 사이의 영원한 이별(인 걸로 이해되던)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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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역시 그제야 8년간의 연애를 끝마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잠시 잊고 있다가도 새 시즌이 시작된다고 하면 기필코 모든 에피소드를 섭렵하고야 마는, 매 에피소드마다 제임스 스페이더를 비롯한 주변 캐릭터들에게 듬뿍 애정을 주었던 그런 연애의 마음을 접으려 했다는 말이다. 정말 끝인 줄 알았다. 레딩턴은 아픈 듯 했고, 엘리자베스 킨은 이별을 고했다. 그래서 이 글을 '블랙리스트'에 대한 이별 편지 정도로 생각하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시즌 9가 오는 10월 21일에 다시 시작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펼쳐나갈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엘리자베스 킨을 보살피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었던 레딩턴으로 시작되었던 시즌 1. 점차 복잡한 관계망이 그려지고 그 매듭을 풀기 위해 달렸던 8년의 세월, 그리고 이별. 그렇다면 '블랙리스트' 시즌 9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어떤 이야기의 궤적을 펼쳐 낼 것이고, 다시금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런 탓에 이 글은 ‘블랙리스트’와의 결별을 슬퍼하는 텍스트가 아니다. 다시금 시작될 운명적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품은 글이다. 제임스 스페이더는 여전히 인문학을 배경으로 한 놀라운 대사를 쏟아낼 것이고, 엘리자베스 킨은 FBI와 범죄 세계의 간극 속에서 여전히 방황할 것이다. 아쉬움은 금세 기대로 부풀었다. 그래서 안녕을 고하려 했던 시리즈에의 이별 선언은 어떤 재회의 기쁨으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