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실명제 20년 ①-탈세주범 차명계좌 털고 가야]

지방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한의사 A씨는 매년 6000만 원 가량의 소득세를 신고·납부하는 고액 납세자다. 그러나 사실 6000만 원의 세금은 내야할 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A씨는 현금영수증을 끊지 않은 매출을 장부에 올리지 않고 친척 명의의 통장에 넣어 관리하는 방식으로 탈세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A씨는 과세당국에 의해 차명계좌가 들통 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지 않다. 어차피 차명계좌 주인들이 동의를 했기 때문에 적발돼도 밀린 세금과 가산세 일부만 내면 된다. 단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금융실명제가 전격 발의된 지 20년이 지나 자금세탁방지와 차명거래 처벌 등을 위한 법률들이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차명계좌는 여전히 사회 지도층과 일부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탈세 '필수 아이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대부분은 느슨한 법망을 통과해 처벌대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500여 개의 차명계좌를 통해 약 3000억 원의 재산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이 되긴 했지만 이는 액수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어난 '이례적인' 처벌이다.
현행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차명계좌를 개설했다면 처벌 대상이지만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합의했다면 큰 제재를 받지 않는다. 매출 누락으로 인한 밀린 세금과 가산세를 내면 다시 돈을 찾아올 수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세무조사를 통해 들통난 차명계좌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근절안이 없어 차명거래가 여전하다"며 "자체 프로그램으로 적발된 차명계좌는 관리하고 있지만 그 외에 얼마나 차명계좌가 있을 지는 추정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2011년 6월 기준 국세청이 자체적으로 시행중인 차명재산 관리프로그램으로 관리하고 있는 차명재산은 총 3만1502건에서 4조7344억 원에 달한다. 세무조사나 체납징수 과정에서 파악된 차명재산 가운데 실명화되지 않고 여전히 차명으로 남아 있어 지속적인 감시대상이 되고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처럼 탈세의 근본적인 원인 역할을 하고 있는 차명계좌를 통한 차명거래에 대한 실효성 있는 근절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최근 국회를 중심으로 관련 법률 개정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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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조정식 의원과 6월 이종걸 의원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으며, 안철수 무소속 의원도 1호 법안으로 관련 법안 발의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6월 발의한 민병두 민주당 의원의 법안에 포함된 차명거래 제재안의 수위가 높다. 민 의원은 '부동산 실명제법'의 원리를 차용해 △모든 금융거래자에게 실명의무 부과 △차명인에게 증여 의제 적용 △실질권리자는 차명인 등에게 자산 및 이익반환청구 금지 △전체가액 기준 30% 과징금에 10%(1년 차), 20%(2년 차) 이행 강제금 적용 등을 일명 '차명거래 금지법'에 적용했다.
민병두 의원실 관계자는 "차명계좌는 어디에 얼마가 쌓여 얼마의 세금을 탈루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안창남 강남대 교수는 "현행법상 차명계좌는 실제 돈의 주인이 차명계좌 명의자에게 증여를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며 "아예 증여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증여의제 원칙을 적용하고 증여 받은 사람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차명거래를 통한 탈세가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친목모임 회비 관리나 자녀 명의 통장 등 선의의 차명계좌 보유도 있어 극히 예외적인 규정도 둬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이는 전체 차명계좌의 10%도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탈세나 비자금 조성을 위한 차명거래는 과감히 처벌해야 한다" 말했다.
민 의원실 관계자도 "선의에 해당하는 차명계좌는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이 모두 사회에 차명계좌 사실이 노출돼도 떳떳할 것"이라며 "선의와 선의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하나의 원리를 정해 법안에 반영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