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케이크배달…'실버택배'의 하루

지하철로 케이크배달…'실버택배'의 하루

이현수 기자
2013.08.15 06:14

[르포]지하철 실버택배 동행취재기

'실버택배기사' 이원우씨(73)는 지하철로 꽃과 케이크를 배달한다. 이씨는 "서너 건 배달하면 하루가 금방간다"며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좋다"고 말했다.
'실버택배기사' 이원우씨(73)는 지하철로 꽃과 케이크를 배달한다. 이씨는 "서너 건 배달하면 하루가 금방간다"며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좋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입니다. 케이크 배달 때문에요. 지하철역 입구에서 집까지 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시겠어요? 네, 택배이긴 한데 지하철로 가려고요. 어르신 배달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꽃과 케이크, 서류를 배달하는 택배기사들이 있다. 속도를 기대하긴 어려워도 정확성과 책임성면에선 최고인 '실버택배'다. 주로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택배전문업체나 소비조합에 소속돼, 정부 부처나 기업의 택배 일을 맡는다.

지난 9일 오전 서울 회현동의 한 소비조합에서 만난 이원우(72) 할아버지는 한 손에 '5호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회현역으로 걸어 나온 그는 지하철역 내 '디지털뷰' 앞으로 가더니, 길음역 버튼을 누르고 가는 길을 살폈다. 검색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 베테랑의 면모가 엿보였다.

◇지하철 '무료'…실버택배 늘어난다

체크무늬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금시계와 안경을 착용한 이씨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퇴직 전 대구의 섬유업체에서 일을 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직접 장사를 해 자녀 둘을 대학까지 보냈다. 새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는 딸이 사준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잘해. 아들은 대기업 부장이야. 용돈도 많이 주지. 근데 내가 시간이 남고 체력이 있는데 왜 집에 있어. 일이 있으면 나와서 하는 거야. 돈도 벌고 시간도 빨리 가고 좋아. 벌어서 손주들 용돈도 주고, 헬스클럽도 다녀."

이씨는 주 5일 근무한다. 하루 주문량은 2~3건이 보통이지만 많을 때는 5~6건도 한다. 정해진 것은 없기 때문에 하루에 한 건이 없을 때도 있다.

"제일 많이 다니는 곳은 강남하고 여의도지. 금융 회사가 몰려있으니 택배 주문도 많아. 갈아타고 가면 1시간 40분 걸리는데 7000원을 받어. 시간당 4000원꼴인 셈이지. 운이 좋으면 과천 정부청사로 배달도 가는데, 거리가 멀어 1만원도 받거든."

그는 길음역 3번 출구로 나와 다시 1114번 버스를 탔다. 도착지 근처인 정릉동 풍림상가까지는 10정거장이다. "상가 앞 갑니까. 안내방송 나오나요." 이씨가 물으니 버스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헷갈리면 고생이야. 더 가서 내릴 때도 있어서 안내방송을 꼭 물어보고 가야해. 길 잃었을 땐 '다산콜센터'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첫 배달은 한 번에 전달이 됐다. 이씨는 "집에 사람이 없고 연락조차 받지 않으면, 물건을 경비실에 맡겨두거나 연락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토로했다.

◇하루일당 '1만4000원'

이씨같은 고령 근로자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의 60세 이상 개인회원가입자는 2007년 417명에서 이듬해 773명, 890명,1194명, 1240명, 지난해 3320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2007년 대비 증가율은 무려 796%에 달한다. 여러 직종 중에서도 물류·창고관리는 희망 상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인기다.

이씨는 "내가 속한 회현동 소비조합에선 2명이 일하지만 회사마다 소비조합이 많고 일반 택배회사 소속도 있다"며 "남대문이나 고속터미널 꽃시장에 소속돼있는 노인들도 수도 없이 많다"고 귀띔했다.

아침 일을 마치고 다시 소비조합으로 돌아온 이씨는 오전 10시 반부터 일이 생길 때까지 은행 로비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나 신문에 나온 스도쿠 문제를 풀면 시간이 잘 간다고 했다. 오후 4시까지 기다리다 일이 없으면 집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오후 2시 59분 전화벨이 울렸다. "꽃집이야."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2호선 문래역 근처 산부인과에 꽃을 배달하러 가는 임무다. 회현역에서 서울역으로, 다시 2호선 시청역으로 지하철을 갈아타는 동안 이씨의 온 몸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이날 일은 오후 4시가 넘어서 끝났다. 하루 2건 배달로 손에 쥔 돈은 1만 4000원. 밥값을 빼니 정확히 1만원이 남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마음먹기 달렸잖아. '이거 아니어도 사는데. 때려치 뿌리자(그만 둬 버리자)' 하다가도, 하루쉬면 '집에 있으면 뭐하나 또 나가야지' 생각 들고. '등신같이 살아서 30도가 넘는 찌는 더위에 이게 뭔가' 싶다가도, 중풍 온 친구들 보면 내가 건강해서, 배달하는 일이 잘됐다고 느껴. 세상 일이 다 그래."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